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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23년 10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해 · 안동 · 의성 · 문경 · 홍주 등이었는데, 왕산은 1896년 (고종 33년) 3월 10일 선산 · 상주 · 성주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이끌고 김산(김 천)으로 건너가 김산향교(金山鄕校)에서 이 곳 유생 들과 연합하여 창의한 것이 김산의병이다. 이 때가 3월 29일이었는데, 이기찬(李起燦)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왕산은 참모장에 올라 “나라에 환란이 있 을 때에는 혹 초모하고 혹 창의해서 마침내 안정토 록 하는 것이 상하 각자가 해야 할 도리이다. 지금 왜 적이 우리나라 안에 발을 내리고 앉았음이 이미 두 어 해가 되었건만 …… 바라건대 여러분은 같은 소리 로 응모하라. ……”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김산의병은 성주와 김산 두 곳에 진(陣)을 치고 대구 로 진격하기로 하였는데,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왕산은 남은 의병 1백여 명을 이끌고 북상 하여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하였을 때 고종의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이 때, 왕산은 심중이 찢어지는 듯 하였지만, 어명을 받들어 의진(義陣)을 해산할 수밖 에 없었다. 그리고, 왕산은 잠시 청송으로 옮겨와서 학문에 전 념하고 있었다. 그 러던 중 1899년(고종 36년) 2 월, 나라의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올랐는데, 영 희전(永禧殿) 참봉에 제 수되었다. 성균관 박사 (博士)를 거쳐 1904년(고 종 41년) 8월 평리원(平 理院) 재판장에, 의정부 참찬(參贊)에 올랐다. 이 때, 왕산은 ‘학교를 세워 인 재를 양성할 것’을 포함한 10가지의 내용이 담긴 헌 의(獻議)를 제출하였다. 그의 애국충정이 배어 있는 개혁안이었다. 또, 이 무렵 왕산은 공제소(共濟所) · 진명회(進明 會) · 공진회(共進會) · 정우회(政友會) · 충의사(忠義社) 등 배일단체에 관여하면서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이 권을 챙기는 침탈행위를 눈여겨 보면서 자강개혁론 을 펼쳤으며, 장지연(張志淵)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 의 안목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렵은 나라의 사정이 참으로 암울한 때였다. 1904년(고종 41년) 2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곧 이어 우리나라와 강제로 한일의정서 (韓日議定書)를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 골화하였으며, 전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어내 한국 을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을 펴고 있었 다. 뒤 이어진 1905년(고종 42년) 11월 17일 한 · 일 간에 을사오조약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는 이 조약 에 의하여 외교권이 일본에 위임되고 껍데기만 남았 다. 그리고,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 부에 자리잡고 앉아서 온 나라의 살림을 감시 · 감독 허위 의병장(1855~1908) 초상화 구미 왕산허위선생기념관(윤태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