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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기(李承畿) 1887~미상/의병/건국훈장 애국장
1912~1913년 경북 안동(安東)·영양(英陽) 일대에서 유시연의진(柳時淵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모집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안동 출신의 유시연은 190 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 06년 봄 경주 분황사 (分皇寺)에서 열린 열읍(列邑)의 병 대표 모임에서 영남의병대장(嶺南義兵大將)으로 추대되었고, 1908년 여름까지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와 동부 지역 일원에서 활동하 였다. 이때 유시연은 안동군 임동면 대곡리(大谷里) 출신의 의병장 박인화(朴仁和)가 이끄는 박처사의 진 (朴處士義陣)과 영덕의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그 리고 영양의 김성운의진(金成雲義陣) 등과 연결하여 일본군 토벌대를 공략하는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1908년 2월 28일 임동군 대전(大田)에서 일본군 토벌대에게 패한 후, 1908년 5월경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2년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1913년 8월 체포되었다. 1914년 3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상인(傷人).공갈죄(恐喝罪)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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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기(崔明起) 1882~미상/의병/건국훈장 애족장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고종 황제의 특사를 문제 삼아 고종 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후기의병이 일어나 전국적인 항쟁을 이어갔다. 최명기는 이러한 후기의병기에 2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8년 8월 25일에 의병 4명과 청주군 청천면(青川面) 괴석곡리(怪石谷里) 심생원(沈生員)에게서 1원 50전을 군자금으로 거두었고, 음력 9월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後坪里)의 정모(鄭某)에게서 현금 10원 과 짚신 10켤레를, 송철호(宋哲浩)에게서 현금 15원을 군자금으로 모금하였다. 또 25일경 청주군 청천면 중리 (仲里) 김생원(生員)에게서 현금 1원을, 26일경 구운리(九雲里) 황종철(黃鍾哲)에게서 4원을, 여내곡리(余内谷里) 송모(宋某)에게서 5원을, 29일경 청주군 동면(東面) 장천리(長天里) 최모(崔某)에게서 7원을, 삼봉리(三峰里) 김치상(金致象)에게서 6원과 짚신 10켤레를 각각 군자금과 군수품으로 모집하였다. 최명기는 1910년 7월 13일 공주지방재판소(公州地方裁判所) 청주지부(清州支部)에서 이른바 '강도죄' 등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