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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⑰ 81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아는 사람 구 실 어렵구나! - 절명시 네 수 중 제3수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한다” “명성황후는 비용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수령 자리를 팔기로 마음먹고 민규호에게 그 정가를 적어 올리도록 하였다. 민규호는 근민관(近民官)의 관직은 팔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응모자가 없도록 하기 위 해 그 가격이 10,000 꾸러미라면 20,000 꾸러미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 응모자들은 더욱 경쟁이 심하 였고, 그들이 관직을 받으면 백성들에게 착취를 강 요하여 백성들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민규호 는 후회하였다.” - 『매천야록』 제1권 갑오이전 이때 초시(初試) 직을 매매하기 시작하여, 그 가격 은 200냥에서 300냥으로 동일하지 않았으나 500냥 을 호가하면서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갑 오년(1894) 이전 두 식년(式年 과거 보는 시기를 정 한 해) 동안은 1,000여 냥씩 하였다. 그것은 화폐가 점차 많아지자 화폐 가치도 점차 떨어졌기 때문이다 (『매천야록』 제1권 갑오이전) 『매천야록』 곳곳에서는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탐 관오리들의 탐학(貪虐)을 그리고 있다. 이는 동서고 금을 막론하고 망국의 징조다. 매천은 조선의 위기 가 구미열강과 일본의 침탈에서 비롯된 점도 있지 만, 내부 요인이 더 크다고 인식하였다. 조선 정부는 대외 위기를 해결할 만한 능력을 갖추기는커녕, 세 도가들의 매관매직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내정조 차도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매천은 관 계 진출을 단념하고 구례 만수동으로 들어가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강제 한일병탄 한 해 전인 1909년 무렵, 황현은 주 변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 는 것을 원망한다”고 나라 안 부패상에 비분강개하 였다. 사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이 아닌가. 매천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부정부패를 물리치고 내정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매천은 나라의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책임을 묻고, 후세 경계 로 삼기 위해 역사서 편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우리 세 사람은 매천의 『오하기문』과 『매천야록』 저술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사회 는 지금도 지난날의 망국 원인인 지도층의 부패와 비리, 관리들의 탐욕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는 우리 백성들 스스로가 부패한 인물을 나라의 지 도자로 삼는, 그 새 일백년 전 망국의 교훈을 아직도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자연스럽게 매천 저서의 원고 원본 이야기로 옮 아갔다. 황 선생은 “할아버지가 쓰신 글들이 100년 이 지나고 보니 원본 훼손이 매우 염려된다”고 하면 서, 원본의 영구 보존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중이라 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홍 교수는 그 원본의 중요성 과 영구 보존방안에 대한 여러 조언을 하였다. “『오 하기문』과 『매천야록』을 비롯한 매천의 유묵들은 국 보급 문화재다. 개인의 소장보다는 국가기관이나 대 학 박물관 위탁 소장이 좋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조 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