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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⑭ 81 로까지를 ‘서암로’로 이름 지었습니다. 그 일대가 할 아버님 출생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죽 기 전에 이 거리 어디에다가 두 분 동상을 세워 후세 들에게 '나라사랑' 본보기로 삼게 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의병이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저도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3대 뿐 아니라 4대, 5대로 이어지는 현실입니다.  현행 보훈법에 따르면, 해방 전에 돌아가신 유공 자의 후손 보훈 혜택이 손자 대까지이고, 해방 후에  돌아가신 분은 아들 대까지입니다. 하나의 잣대로  줄을 긋자 조상의 순국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후 손도 여러분 계십니다. 감히 청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이를 한 대 더 완화하는 게 나라가 독립 운동가를 예 우하는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돌아가신 의병이나 독립투사 선열을 더 발굴하 여, 그 어르신들의 신원을 풀어주는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양진여 의병장 행장] 양진여(梁振汝) 의병장은 1862년 5월 11일 광주군 서양면 니동(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과 문흥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호는 서암(瑞 菴) 휘는 진영(振永)이며, 자는 진여(振汝)다. 어려서 부터 청운의 꿈을 품고 공부하였으나, 바람 앞에 등 불과 같은 나라를 보고서 과거를 볼 생각을 단념한 채 부인 밀양 박씨와 함께 주막을 하면서 거병준비 를 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따라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양진여는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7년 10월 30여 명의 동 지를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조직 편성했다. 한때 그 부하가 1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광주·담양·창평 일 대를 근거지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단독으로, 혹은 전해산, 강판 열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일제에 맞섰다. 1908 년 10월 23일에는 단독으로 담양에서 일본군 기병 2 명을 기습 공격하고, 10월 26일에는 나까코지[中小 路] 군조(軍曹 - 현재의 중사 계급)가 인솔하는 일본 군 헌병 7명과 순사 4명으로 편성된 이른바 ‘폭도(의 병)토벌대’를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치열한 교 전 끝에 물리치기도 하였다. 1908년 11월 25일, 일본군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토벌대가 담양 추월산에 머물고 있는 양진여 의병부대를 공격해 왔다. 이에 양진여 의병부대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감투정신으로 적을 공격하 여 많은 전과도 올렸다. 하지만 끝내 화력의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아군 15명이 전사하였다. 1909년 2월, 양진여는 새로 구성된 연합 의진의 총 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지병과 부상으로 원활한 활 동은 하지 못했다. 그해 3월 이후 양진여 의병부대는 사실상 와해된 채, 부대원 일부는 아들 양상기 의병 부대에, 다른 일부는 새로운 독립부대로 활동하였다. 1909년 8월 25일, 양진여 의병장은 일제 토벌대 를 피해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에서 ‘박여진(朴汝鎭)’ 이라는 가명으로 은둔하며 부상을 치료 중, 일진회 원 밀고로 일본군 가지무라[梶村] 중위가 이끄는 40 명의 정찰대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09년 12 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 고받고 불복, 공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에서도 교수 형을 받았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1910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