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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⑬ 81 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전의 할머님 말씀을 전한 바, 당신은 남편이 몰래 찾아올 때를 거의 정확하게 육감으로 알았다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는 미리 토지문서와 옷 한 벌을 머리맡에 장만해 뒀다고 한다. 그런 날 한 밤중에 할아버지가 몰래 담을 넘어 안방으로 와서 잠시 머물며 한바탕 방사를 치른 뒤 옷을 갈아입고 토지 문서를 들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하였다고 했 다. 그런 탓인지 당신은 의병으로서는 꽤 많은 4남 매(3남 1녀)의 자녀를 두셨다. 끝까지 동지와 부하를 지키는 그 의리가 100년을 지난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의병활동 가운데도 집에 두고 온 아내를 찾아온 당신의 뜨거운 정열이 가상하기도, 눈물겹기도 하였다. 친일파 득세 ……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조세현 선생을 뵙고자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으로 찾아갔다. 조 선생은 의병정신선양 학술토론회를 앞 두고 그 준비로 몹시 바빴다. 인사 후 첫 마디가 의병장 후손답게 의병 정신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국군의 뿌리는 '동학군 → 의병→ 독립군→ 광복군→ 국군”으로 그 명맥을 이 어왔습니다. 옳을 ‘의(義)’ 자는 희생의 제물을 상징 하는 양 ‘양(羊)’ 자에, 나 ‘아(我)’자를 합성하여 만든 글자로, 곧 '내가 먼저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 의병 후손으로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구한말 의병 수는 약 30만 명 내외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분은 고작 1,800명 에 지나지 않습니다. 후손들 모두 어려운 현실이지 요. 저희 집도 하루 세 끼 끼니 잇기가 어려웠고, 쉰 밥 먹기가 일쑤였지요.” 필자가 10여 년 간 항일집안 문턱을 드나들고, 그 후손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면 해방 후 친일파 세상 으로 가난하게 살아왔다는 ‘가난의 대물림’ 이야기 를 귀에 익도록 들어왔다. 친일파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심지어는 성(姓)까지 바꿔서 산 후손도 있고, 할 아버지의 항일 행적을 묻고 살아온 후손도 없지 않 광복회 조세현 특별위원 조세환 선생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할아버지 조경환 의병부대 활 동 보도 『대한매일신보』(1909.1.15.) 원본(필자 촬영). 조경환 의병부 대 50명이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했다고 보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