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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중국인으로 조선독립운동에 앞장선 “송정헌” 81 송정헌 지사의 큰아들 유수송 씨는 독립운동가 부 모 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음악가의 길을 걸어오 다 아버지의 고향인 조국에서 1988년 6월 영주권을 얻었다. 큰손자 유승남 선생은 백범사상실천운동연 합 이사와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공동 집행 위원장을 맡아 할머니 송정헌 지사가 못 이룬 꿈을 향하여 고국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유승남 선생의 할머니 송정헌 지사는 중국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 하여 1990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을 받은 분이다. 송정헌 지사는 1937년 강 서성(江西省) 노산구강(蘆山九江) 폐병원에서 간호사 로 근무할 때 훗날 남편이 되는 유평파(劉平波, 1990 년 애국장) 지사의 형 유진동(劉振東, 2007년 애국 장) 선생을 만났다. 유진동 선생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뒤 가족들과 함께 만주(중국 동북지방)로 이주했고, 1920년대 중 반에 상해로 가서 동제대학(同濟大學) 의과대학에 입 학해 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28년 4월 안병무 (安炳武), 김기승(金基升), 구익균(具益均) 등 10여 명 과 함께 항일투쟁단체인 한인학우회를 조직했다. 그 러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심하자, 1932년 대한민 국 임시정부를 따라 난징으로 이동했으며 1934년까 지 흥사단 원동위원부, 1933년에는 한국독립당원, 1936년에는 민족혁명당원으로 활동했다. 남편 유평파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입대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27년간 피난 생활을 하면서 류저우 [柳州]에 도착한 것은 1938년 11월 말이다. 류저우 에서 임시정부의 짐 보따리를 풀 때 임시정부는 매 우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1939년 3월 1일 용성중학 (龍城中學) 강당에서 3 · 1운동 20주년 기념대회를 열 고 기념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독립에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기념선언에서 독립운동이 나아 갈 방향을 제시하고 광복 후의 건국구상을 밝혔다. 또한 한국의 청년들을 모아 1938년 11월 한국광복 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 향과 방법을 모색하였다. 송정헌·유평파 지사 부부는 함께 한국광복진선청 년공작대에 입대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모았다. 청년 부부독립운동가 유평파·송정헌(국가보훈부 제공)송정헌 지사의 손자 유승남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