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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전쟁기념관 “김상옥, 겨레를 깨우다” 특별전에 즈음하여 81 시(1919.7.10)해 오던 ‘연통제’가 일제의 차단으로 1921년말 거의 붕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한편 김상옥이 의열단에 가담 (1921.1)한 것과 의열단장의 무기 지원 등은 사실이 지만, 김상옥의 서울 잠입과 아래 3차례의 시가전은 “의열단 지침”이 아니라 임정 지침에 의한 활동 중의 사건이었음을 이들 문헌이 확인시켜 주고 있다. ‘제1 시가전’ 독립운동 탄압 총본산인 종로경찰서 폭파(1923.1.12) 서울에 잠입한 김상옥은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가까운 삼판통의 매제 고봉근(高奉根) 집(현 후암동 304)에 ‘한당 서울혁명사령부’를 설치하고, 동지들 을 다시 규합, 훈련시켜서 임정의 지침이며 자신과 의 약속인 총독 등 고관과 친일분자 처단, 총독부 등 일제관서 파괴 등을 준비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23 년 1월 12일 저녁 8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일 제를 당황케 하고 10여명을 부상케 한 일대 혼란을 야기시켰다. 김의사의 종로서 폭파는 ①임정과의 약속에 총독 부와 함께 종로서(독립운동 탄압 본산이며 자신과 가족도 고난 당한 곳)가 포함되어 있는 점, ②폭탄의 성능 실험이 필요했던 정황, ③의열단이 보내기로 한 대형폭탄의 도착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계획수정 이 요구된 점(이정은, 『김상옥 평전』, 민속원, 2014, 373~374쪽), ④은닉했던 폭탄을 사령부로 옮기기 위해 모친을 통해 회수해서 몸에 지니고 종로를 걷 던 중에 원한의 종로경찰서를 본 순간의 공적-사적 보복 충동 등에 의한 것으로 해석된다. ‘제2 시가전’ 임정 서울혁명사령부(후암동) 피습 격 전(1.17) 한살림(韓薩任) 종로서 폭파 후 계엄 상황으로 변한 환경에서도 김상옥은 태연하게 동지들과 협의, 도쿄의 일본 의 회에 출석차 1월 17일 남대문역을 통과하는 사이토 총독을 역전에서 저격코자 동지(병력)들 배치 등 만 반의 준비를 마치고, 자신은 가까운 후암동의 ‘서울 혁명사령부’에서 전날 밤을 지냈다. 그런데 종로서 폭파자가 김상옥일 것이라고 특정 한 종로경찰서 체포조가 1월 17일 새벽 4시 남대문 밖 ‘사령부’를 군경 300여명 포위 속에 급습했다. 김 상옥은 집안에 들어 온 5명 중 4명을 명중시키고, 신 을 신지않은 채 담장을 넘어 눈 쌓인 남산을 종주, 피 신했다(『김상옥 전』 16쪽). 그 때 쌓인 눈 속 발자국 간격이 5~10m여서 ‘축지법’ 얘기도 있었다 한다. ‘제3 시가전’ ‘1 대 1,000’ 서울 항일 시가전 3시간의 승리(효제동)’(1.22) 남산을 종주한 김상옥은 왕십리 ‘안장사’에서 승복 을 빌려 입고, 짚신을 거꾸로 신어 눈 속 발자국이 반 대 방향으로 나도록 걸었다. 수유리 이모 집을 방문 하여 한나절을 쉰 다음, 동지들과의 연락과 다음 과 업을 위해 동소문을 거쳐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어 릴적 이웃인 여성동지 이혜수와 그의 부친 이태성의 집(종로구 효제동 73번지)에 도착해서 동상을 치료하 고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다음 투쟁을 논의했다. 그 과정에 체포된 동지의 비몽사몽간 답변에서 김 상옥의 소재를 눈치챈 종로서가 조선총독부에 보 고, 총독부가 나서서, 경기도경 산하 전 경찰력(당 시는 경성=서울에, 경기도 경찰국 산하 4개 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