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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③ 81 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윤동명과 남영우는 여기에 반론을 폈다. 이렇게 되자 총회는 한 지부의 문제이 므로, 전국대회는 보다 중요한 과제의 토론이 우선 이라고 하여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의장이 임명한 5명 의 소위원회에 일임했다. 문제는 소위원회가 열린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공산당 4차당계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5 명 위원과 김문준의 타협으로 12일 심의에 의해 결 국은 윤동명, 남영우는 제명 취소, 정남국은 무기정 권, 김광은 스파이 용의와 투쟁자금 횡령으로 제명 을 결정했다. 특히 정남국의 경우는 재일본조선노동 총동맹의 중앙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도쿄, 오사카 에서의 파벌적 행동을 자행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 급되었다. 이후 토론이 진행되었고 정남국의 무기정 권은 의장에 의해 가결되었다. 1929년 시기 일본에서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의 전협으로의 해체가 본격적으로 논의, 실행되었다. 김문준도 1930년 2월 7일 전협 조선인위원회에 비 난의 취소를 요구하고, 2월 25일에는 성명서를 발표 했다. 그는 해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반대 투쟁 을 전개하지 않았다. 단지 오사카지역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과 조직선이 달 랐기 때문이다. 대중운동 바탕, 재일조선인 대중을 중심으로 반일 투쟁 전개 김문준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오사카지역의 재 일조선인 민족운동을 선도했다. 그는 재일본조선노 동총동맹의 중심세력이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 맹 대회를 거치면서 조직적 발전의 내용이 확인되 고, 조직 내부 정치세력의 변화에 따라 운동의 방식 도 변하여 정치투쟁 부분이 1927년 이후 강화된 것 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제4회 전체대회에서 내 부 투쟁을 초래하기도 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조선공산당 일본부와 일 본총국의 구성원이 주도하고 있었고, 그 결과가 ;오 사카사건‘의 정리 방식에서 확인된다. 이후 재일본조 선노동총동맹의 해체도 그 연결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문준은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지역의 재일 제주인 사회와 오사카 지역 사회에서 대중적 운동을 선도했다. 그는 운동지형의 변화를 읽고 조 직적 관점에서 운동의 큰 흐름에 따랐다. 지역의 대 중운동에 기초하여 적극적으로 재일조선인 대중을 중심으로 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본고는 강만 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 과비평사, 1998 및 김인덕, 「1920년대 재일본조선 노동총동맹과 김문준」, 『글로벌코리안연구』 5, 2021 등을 참조함) 현재 본지 편집위원, 청암대 교수, 재일코리안연구소 소장, 재외한인학회 부회 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김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