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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철기 이범석 81 흐트러진 우리 군의 역량을 다시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묘책이었 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 설되었을 때 제2지대장의 책임을 맡아서 일본군을 무찌르는 일에 앞장서고자 했다. 그리고, 광복전 쟁을 통해서 일본군을 우리 한반 도에서 몰아내려는 그의 꿈은 언 제나 불타고 있었다. 이러한 철기 의 꿈은 청산리전투의 신화를 남 긴 김좌진 장군과의 만남에서 비 롯되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국내정진군 총지휘 등 맡아 분투 한국광복군 창설 후, 철기는 광복전쟁을 위해서 미 국 전략정보기관(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합 작하여 국내 진공계획을 수립하고, 군사훈련을 꾸준 히 실시하였다. 사격술과 도강술은 물론 게릴라전술 을 포함한 철저한 군사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때, 정예요원 50명을 선발하여 특수훈련도 시켰 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 렵, 우리 광복군이 미군과 제휴하여 한국에 상륙작 전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이루어지지 못하 였다. 이처럼 철기의 삶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의 드라마와 같았다. 1941년, 철기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여 광복군 역량 강화에 온힘을 쏟았다. 1945년 8월 18 일 그는 ‘국내정진대’의 일단을 데리고 미군 수송기 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일본군의 진입 거 부로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철기의 이러한 항일무장투쟁의 긴 여정은 그의 회고록 『우 둥불』(1971년)에 오롯이 담겨져 있는데, 이것이 우 리 후세들에게 생생하게 그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의 그칠 줄 몰랐던 항일무장투쟁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한국광복군 2지대 간부들과 미군 OSS요원들(1945.9.30). 앞줄 왼쪽 노태준, 가운데 이범 석, 그 옆 안춘생 등.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