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page

80 2025년 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도소 문서기록 관계자와 함께 문서고에 들어 가 한 시간 남짓 뒤적인 끝에 두 분의 판결문 을 찾았습니다. 제가 조상의 문서를 찾고자 나 선 지 10여 년, 땅마지기도 날렸지만 그때의  기쁨은 말할 수도 없었지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지요.” 두 분 동상을 세우고 싶다 양일룡 씨는 국가 기록은 마땅히 공개돼야 하며, 더욱이 일제 강점기의 기록은 광복된 정 부가 솔선하여 찾아 그 공과를 발표하고, 그 에 따라 표창 징계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고 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해방 이후 그러 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하면서 문서를 찾아다 닌 10여 년 세월을 회고했다. 후손이 눈이나 뜨고 열정을 가지면서 기록을 찾아 조상의 행 적을 밝히면 포상이 되고, 그렇지 못한 후손의 조상은 그대로 영영 묻혀 넘어가는 잘못을 지 적했다. 아마도 기록이 공개되면 조상의 매국 행위나 친일 행위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 주류 로 뿌리박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쓴 웃음을 지 었다. - 부자 의병장 후손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제 나이 이제 여든입니다. 1987년 4월, 광 복회 전남 광주 연합지부 명의로 할아버님 아 호를 딴 ‘서암로(瑞庵路)’지정 청원서를 제출 하여 1992년 10월, 광주 서방 네거리에서 전 대(전남대 - 필자) 네거리를 거쳐 동운 고가도 양상기 의병장 판결문(1910.5.17, 국가기록원 제공)  양진여 의병장의 교수형 집행 사실(아래쪽 우측 적색 표기 부분)을  수록한 대한제국 『관보』 제4698호(1910.6.7). 내각고시 제62호 로 1910년 5월 30일에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음을 알리 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