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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4년 1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를 입혔다. 이때 고창의 모양(牟陽) 백성들이 기삼연 의병부대에게 적극 협력하여 기밀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무기와 군량을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이 전 투에서 특히 김태원의 공이 컸으며, 아군의 군사 3, 4명이 전사하였다. 1907년 12월 7일, 기삼연 의병부대는 마침 영광 법성포에 많은 세곡(稅穀)이 쌓여 있다는 정보를 입 수하였다. 백여 명이 먼저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기 습 공격하여 소각시킨 후 창고 곡식을 빼앗아 군량 미로 쓰고, 남은 곡식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 었다. 1908년 1월 말(양력), 장성 무동촌에 이르러 적을 만나 격전을 벌여서 적 5 · 6명을 살상했으나, 아군도 흩어졌다. 이때 전투 양상은 소단위 유격전이었다. 특히 김태원의 유격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 나 날씨가 점차 추워지자 도망병이 생겼다. 다시 흩어진 군사들에게 연락하여 동짓날에 영광 을 공격하려는데 기밀이 누설되고, 추위로 병든 군 사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서우산 속에서 군사를 휴식시킨 후 나주의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부대를 철수하였다. 기삼연 은 의진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험준한 지형이라 설을 쇨 계획이었다.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병사들의 옷 이 젖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적이 불의에 내습 공격하였다. 피아간 40~50명의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 끝에 결국 완전 포위당하였다. 기삼연은 최 후를 각오했는데 갑자기 안개가 내려 깔려 요행히 의진을 이끌고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곳을 탈출한 기삼연은 순창 복흥산으로 들어갔다. 부상 으로 의병 활동의 한계를 느낀 기삼연은 장졸들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 이도록 해산명령을 내렸다. 기삼연은 구수동 촌가에 잠복하여 설을 쇠면서 정 월 초하룻날 아침 설상을 받았다. 그때 적 수십 명이 들어와 기삼연을 찾으며 집주인을 해치려 하였다. 기삼연은 창을 열고 큰 소리로,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을 해치지 말라”고 하면서 순순히 체포돼, 담양 으로 압송되었다. 담양 군수가 거만한 언사로 농을 하자 크게 꾸짖었다. “너는 선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지금 왜놈의 종노릇을 이렇게 심하 게 하느냐.” 담양에서 다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교자(가마)를 메고 가는 이들이 눈물 을 흘려 가는길이 지체되었다. 광주 감옥에 수감된 기삼연은 자신의 참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애초 그의 꿈은 해를 삼키려고 한, 곧 일제를 패망 시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때 마침 김태원이 창평에서 일본군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을 추격하 다가 기삼연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정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