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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4년 11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가자 순사나 순사보 하던 놈이 일본인 대신 경찰서 장으로 승진되는 등, 신나게 휘파람을 불었으니, 민 족반역의 무리를 어찌 처단했겠는가. 3년 뒤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반민특위법’을 만들 어 활동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 아래 1949년 6월 6일‘친일’경찰에 의해 강제로 반민특위가 해산 되는 수모 속에 그 막을 내렸다. 이러고 보니 임시정 부 군무부장(현,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김원봉 독립 투사가 친일 고문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는, 일제 강점기에도 없었던 수모로 너무나 원통한 나머지 김 구 · 김규식 등의 지도자와 북한을 방문한 후 남한으 로 귀환치 않았다고 한다. 어찌 맨 정신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으 랴. 하지만 숙소가 워낙 외진 시골인지라 가까운 곳 에 술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숙소 앞 밥집으로 가 서 부침개 술안주를 부탁한 뒤 소주병을 땄다. 송강 정철의 유배지 전라도 창평 땅에서 ‘민족정기’가 땅 에 떨어진 현실을 한탄하며 쓴 소 주로 울분을 달랬다. 이튿날(2007년 11월 7일) 아침 8시 30분, 오성술 의병장 손자 오 용진 선생과 나는 승용차를 타고 창평 숙소를 벗어나 광주로 달렸 다. 먼저 광주 시민공원 어귀로 가 서 장국밥을 먹은 뒤 오성술 의병 장의 생가 터이며, 오의병장이 고 이 잠드신 죽산마을로 갔다. 마을 들머리 가게에서 오용진 선생은 막걸리 한 병과 오징어를 마련하였다. 곧 죽산마을 독배산 묘소에 이르러 손자는 산소 언저리를 정성껏 보살핀 뒤 상석에 술잔을 올리고, 고유(告由) 인사를 드렸다. 나도 뒤 이어 절을 드렸다. 나주평야를 조망할 수 있 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이어 엎어지면 무릎 닿을 죽 산마을에 오성술 의병장 생가 터가 있었는데, 지금 은 집안 조카가 살고 있다고 하여, 집 어귀에서 사진 만 찍었다. 다음 간 곳이 오성술 의병장이 집안 숙부 뻘 되는 오준선에게 배웠던,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 동에 있는 용진정사(湧珍精舍)로 갔다. 이곳은 당시 도학(道學)과 문장이 장성의 송사(松 沙) 기우만(奇宇萬)과 쌍벽을 이루던, 대유학자 오준 선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 오성술이 이곳에서 스승에게 배우며 몸과 마음을 가 다듬은 곳이었다. 석문산 전적지로 가는 길 오용진 선생은 다음 전적지인 석문산으로 가는 길 맥아더 기념관에 소장된 앨범 속 사진. 미군정 기간 동안 경찰에 붙잡혀 처형된 게릴라 들(박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