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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4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의 본보기며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 / 그 장 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 리라 허호 선배의 안내로 임은동 허위의 생가 터를 들 렀다. 생가는 6 · 25전란으로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다. 1915년 유족들이 만주로 망 명 당시에 구미에 거주한 임은 허씨는 10여 가구였 으나, 당시(2000년)는 허호 씨 가족만이 고향을 지키 고 있었다. 만주로 망명했던 왕산 유족들은 이후 러 시아 · 키르키즈탄 · 중국 · 북한 ·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 어졌다고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왕산 후손 허도성 목사가 일시 귀국하여 서울에서 만났더니 임은 허씨 후손들이 그 새 ‘일리야’, ‘부로코피’, ‘슈라’, ‘나타샤’ 가 되었고, 당신 후손마저도 머잖아 ‘로버트 허’, ‘벤 허’가 될 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그해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당시 김관용 구미시 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 령 기념관을 짓는다고 한창일 때인데, 그에 앞서 왕 산 생가 복원부터 먼저 하는 게 순서가 아니냐는 호 소의 글이었다. 그 얼마 후 허호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구미시장의 결단으로 왕산 허위기념사업회 를 구성하여 사업추진 계획서가 만들어진 바 구미로 와서 조언을 해 달라는 초청이었다. 그 사업 추진 계획서는 대구에 사시는 왕산 현손 허경선 선생이 생가 부지를 구미시에 기부 체납하여 그곳에 ‘왕산기념공원’을 만들고, 생가 건너편 양지 바른 곳에 별도로 허씨 문중에서 부지를 마련하여, 구미시비로 왕산기념관 및 왕산도서관을 세운다는 복안이라고 했다. 이에 나는 찬의를 표했다. 임은 허씨 두 항일 열사의 순국 장면 1908년, 왕산 허위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 본 통감부를 깨트리고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10여 킬로미터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접 전하였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신식 무기를 당해내 지 못해 경기도 연천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가 대규 모 국내 항일 의병전의 가장 치열한 싸움이자 마지 막이었다. 그 뒤 매국적 이완용(李完用)이 경기도 연 왕산허위선생기념관(2009.9 28 신축 개관, 박도 촬영)왕산 생가터에 조성된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박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