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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7월31일 수요일 8 (제211호) 시·군·구 지부 이길은험난하고도어려운일이었다. 타지역에비해지리적여건과고령화시대에2천5백여성손이 거주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독거노인이 많은 반면 젊은 청년들은 도회지로 나간 상태에 코로나19까지 겹쳤다. 전국이 떠들썩하고 거리두기를실시하면서 만날 수 없었던 참혹한 실정이었다.2002 년 박우선 회장이 퇴임하면서 회관을 지어야 한다며 200만원의 종자돈을 내놓았을 때 많은 종친들의 반응은 ‘지금 우리 형편에’ 라는 반응이었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회관건립이라는 명제 를던진것이다. 그러나‘신라왕손만파일원’이라는구호를되새기며살고있는 종친들에게는섬광(閃光)처럼받아들여지면서한번해보자는의 지가살아나기시작한것이다. 박우선회장의생각에는‘회관이라도하나지어놓고뭘했다고 말할수있지않느냐’라는생각뿐이었다고말한다.1997년취임하 여 2002년 퇴임하였고,2012년 6월 종친들의 성화에 두 번째 회장 을맡았다.처음에는완강하게고사하였으나하나의꿈이있었다. 그것은‘회관건립’이었다. 2023년 착공식과 함께 박우선 회장을 비롯한 종원들은 시멘트 포대와 벽돌, 모래 등을 직접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박현 국 군수 또한 직접 작업복을 입고 현장에서 울력을 하는 등 종원 들이직접참여하여시공하는끝에2억여원의경비를절약할수 있었다.그리고지난5월16일가진준공식에는기쁨의눈물과함 께‘하면된다븯는박정희대통령의새마을정신을다시한번더상 기 시킬 수 있었다.또한 이날 준공식 일자는 박 대통령이 혁명을 일으킨날짜를기념하는뜻으로택일한것이다. 2002년 박우선 회장 이 내놓은 200만원의 종 자돈은 많은 것을 시사 한 바 있다. 당시 20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 다. 그러기에 이 돈은 절 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는 종원들의 굳은 각오 가 있었다. 그러나 일부 종친들은 회관건립은 할 수 없으니 종친회 재 정이 빈약한 상태에서 이 돈을 써야 한다는 회 장이있었다.그러나박대훈사무국장완강한반대로쓰지못하고 정기예탁으로 은행에 맡겨놓고 만기가 되면 이자를 찾아 복리로 키우기시작한것이다. 2015년3월회관건립발대식을계기로종원들은움직이기시작 했다. 봉화군민회관에서 군내 성손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 황리에마친발대식에는원탁테이블마다각읍면을표시하는명 패를 꽂았고, 좌측 2층 난간엔 “新羅王孫 萬派一源”이란 박정희 전대통령의휘호와“성손의 자존심회관건립으로!”란현수막 이 걸리고, 뒤편엔 “朴氏世系圖”가 대형도표로 내걸려 뿌리에 대한 소중함과소속감을불러일으킨것이다. 이에 즉석에서 모금이 시작되는 등 동기부여가 되어 2023년 4 월10일착공식현장에서2천여만원의성금이답지하고이성금 은700여성손,10억여원이라는놀라운성과로이어진것이다. 봉화읍화천리꽃내마을(무안박씨집성촌)거주박영석종친은 집에서 기르던 한우 1마리(976㎏, 812만원) 끌고 와 선뜻 내놓았 다. 이를 본 종친들은 ‘저 사람이’, ‘설마’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감탄사가 이어졌다. 당시 박영석 종친은 돈은 없고 있는 것 이라곤 집에서 기르던 소뿐이라 회관건립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고전하다. 그리고 박옥래 종친(무안인)은 출가한 딸로서 혼자 살며 남의 집품팔이로모은돈200백만 원을,어려운 환경에 10만원도 많은 돈인데 100만원을 선뜻 내놓은 박맹덕(78세. 무안인). 소규모 농 사를지으면서1천만원을내놓은박재창봉화읍종친회장은아들 에게 내가 낸 돈은 나의 몫이고 너희들도 함께했으면 한다며 권 유,장남은각2백만원,차남은100만원을기탁하며3부자가힘을 보태는기염(氣焰)을보여이는또다른동기부여가되었으며,이 밖에도부자가함께기탁한종원들이수도없이많다. 어머지가 무안박씨라며 300만원을 내놓은 김대현(外孫), 1억 여 원을 내놓은 박우선 회장은 아들 또한 1천만 원을 기탁하면서 힘을보탰고,며느리와사위사돈이각각1백원씩동참하는등온 집안식구가함께하여오죽하면미쳤다는소리까지들었단다. 이에집행부또한힘을실었다. 부회장1명 2천만 원, 고문 1명 2천만 원, 그 외 임원들도 1천만 원에서 500만원의 성금을 기부하였고, 영해박씨, 무안박씨 밀양 박씨, 고령박씨, 반남박씨 문중에서 십시일반 힘을 보탰고, 출향 인사들까지 동참하면서 기적 같은 기적을 이루어 사무실에 현황 판을만들어이들의고귀한뜻을기리고있다. 사실10억여원의모금을이끌기까지는고난의길이었다. 1읍9개읍면을수십차례돌았다.이과정에종친들을불러모 아식사를대접하며회관건립의정당성과후세를위한사업,그리 고종원들의단합된힘을보여주자며독려하고설득했다. 물론모든경비는박우선회장이부담했다.그런데선거관리위 원회에서제동을건것이다.선거운동을하고다닌다며트집을잡 은것이다. 이에 종친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은 우리에게 선거보다 더 중요한일이고,선거는우린모른다며항변했다.이에선관위에서 도놀란표정으로박씨문중의열정은정말대단하다며후원하기 까지했다. 그러나 사실 이 때문인지 박노욱 전군수, 박현국 군수(현) 박 창욱 도의원(현),박동교 군의회 부의장(현),박만우 봉화농협조 합장(현),박종화군체육회장(현)등모든선거에서놀라울만큼 성과를보였고,이들은다시종친회관건립에힘을보탰다. 봉화군종친회관은 백년 이상 견딜 것이라 말한다.내진설계를 하였고, 기초를 70㎝, 조적대신 웅벽을 치면서 모든 콘크리트 배 합은강도270메가파스칼(N/㎟,MPa)을기준으로하였다. 이는 보통의 건축물에서 강도 240으로 하는데 교량 상판 기준 과 같은 270은 추가비용이 발생하여 일반 건축물을 짓는 업자들 또한꺼리는부분이다.그러나봉화군종친회는회원스스로울력 을하면서직영을하였기때문에비용을절감하는반면자재는최 고급으로튼튼한집을짓는게후손을위한일이라생각했다. 처음 회관을 짓기 위한 부지 선정이 문제였다. 수년을 고르고 또고른것이현위치인봉화읍내성로5길28번지이다.2018년5월 214㎡를 매입했다.근처에 내성천 축제장이 있어 수백 대의 차량 주차장을확보한셈이다.그런데문제는도로부지로된17평이다. 이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소유로 이를 불하받아야 올바른 건축물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박우선 회장을 비롯한 집 행부는안동에있는캠코안동지사를수십차례방문하여끈질기 게 설득,3년여 만인 2021년 2월 매입할 수 있게 되어 전체 면적이 289㎡(87평)이되었다. 지상3층콘크리트슬래브건물로건축면적은160㎡(48평)연면 적 473㎡(143평)으로 1층 사무소,2층 휴게음식점,3층 사무소 구 조이다. 공사금액은8억2천1백여만원으로월300만원에가까운임대수 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종친회사무실은 3층을 사용함으로서 봉화군 종친회 구심점역할을 하게 되어 지난 5월 16일 준공식에 즈음하여 모든 과정에 헌신적으로 봉사해온 박우선 회장에게 감 사패를전종원이름으로전달하였고,박대훈수석부회장,박재창 봉화읍종친회장에게는 박우선 회장이 공로패를 전달하며 치하 하면서모든기쁨을참석한600여종친모두가함께가졌다. 봉화군은 경주에서 210㎞ 정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숭조심은 경주의 춘추향제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 박문 (朴門)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우리의 손으로 숭덕전을 수호 하고오릉을비롯한신라선조10왕릉을수호해야했다.1914년출 범한 화수회는 봉화군지역 종친회에서도 함께했다. 그리고 1926 년 전국적인 모금운동에 동참하며 박원필(朴元弼,30원),박달형 (朴達亨, 25원), 박영택(朴英澤, 務安人, 10원) 현종 등이 성금을 기탁하였으며, 1945년 박씨대종친회로 명칭이 변경하면서 봉화 군 박씨화수회는 박씨대종친회 봉화군지부로 명칭이 변경되었 다. 그러나1951년농지개혁령에의해1926년전국성손들의모금 으로매입한20여두락을정부에서몰수하면서당시박봉래전참 봉과박화준종친회장을비롯한평의원들의뼈를깎는노고로되 찾으면서 숭덕전과 신라10왕릉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사단법 인체설립을추진하여정부기관단체와가교역할을할수있도록 1959년 사단법인 신라오릉보존회를 설립 전국성손의 참여율을 높이기위한홍보및계몽활동등을전담할수있는단체로등록 하면서1963년종친회의면모를일신하여왔다. 그러나아쉽게도이사실은구전으로만전해져올뿐기록이없 어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구전으로 전해온 바에 의하면 년대는 미상이나 박도양 회장과 박태용 회장(?~1988)이 초창기에 회장 으로서역할을다하였으며,박장수븡박우선(1996~1999),박지원(2 002~2008) 박도우(2008.06~2012. 06) 회장에 이어 박우선 현 회장 이이끌고있다. 봉화군 종친회는 1988년 전화번호부 겸 종친명부 발행당시 2,9 00여호가 거주하면서 전성기를 맞았으나 산업발달과 이농현상 은 어쩔 수 없었다.박우선 회장은 1997년 취임과 함께 흩어져 있 는종친들의세를규합하고회관건립에대한당위성을적극홍보 하면서회관건립에대한꿈을키웠다. 2009년 부녀회 창립과 2010년 청년회 창립으로 종친회의 안정 적인운영의토대를마련한봉화군종친회는이제회관건립의꿈 을이루면서전국종친회의롤모델이되었다. 현재봉화군종친회를이끌고있는임원은다음과같다. △회장 박우선 △고문 박노욱,박현국 △직전회장 박도우 △여 성회장박순매△수석부회장박대훈△부회장박창옥,박경환,박 사남,박현석,박홍기,박중환,박동호,박승욱,박연경,박무섭,박 시원,박재호,박만우,박동교,박준화,박위자,박영철,박일훈 박 홍재, 박남주, 박규식 △읍면분회장 박재창(봉화읍), 박정수(물 야), 박명교(봉성), 박대수(법전), 박승욱(춘양), 박준해(소천), 박의균(석포), 박동원(재산), 박종진(명호), 박경환(상운), △사 무국장박종화△사무차장박병두,박영숙△감사박종학,박귀옥 -이상- [밀성(밀양)박씨] 봉성면봉양리와물야면복지리에규정공후문목공송당박영 (朴英)의 후예가 살고 있으며, 사문진사공 후 정재 박의중(朴宜 中)의 13세손인 동포 진영(震英)이 조선 선조22년에 당화(黨禍) 를 피해 상운면 설매리에 은거하여 살았다. 후손이 설매와 그 외 각처에살고있다.그리고문단서원마을에입향조는통정대부수 위(壽違)이다. 25대조인 낙촌 박충원(우찬성)은 영월부사시 현 몽으로 단종 능을 찾아 복원한 충신이다. 입향후 자손이 100여호 였으나각처로떠나고현재는20여호가살고있다. [무안박씨] 봉화읍 화천에 큰 집성촌을 이룬다.원래 영양(英陽)의 남몽오 (南夢鰲)가 처음 살았고 봉화금씨(奉化琴氏)와 안동권씨(安東 權氏)가같이살았다.그후수서박선장이어린시절에어머니를 따라 와서 살았다. 이는 신안주씨가 울진 친정에 있을 즈음 남편 송파공 박전(松坡公 朴全, 호조정랑 1514-1558)이 꿈에 나타나 “영천(榮川)땅산단화( 쇈 丹花)가피는마을을찾아가아들을교 육시켜라”는 당부에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된 연유에서 비롯되었 다. 수서공이 스승인 진사 남몽오 선생의 따님과 결혼 한 이후 그 후손들이 계속 거주하고 타 성씨들이 이주하면서 무안박씨 집성 촌이되었다. 마을에는 송파공 박전(명종원년 문과급제, 호조정랑)과 부인 신안주씨의유덕을영모하기위하여후손들이건립한몽화각(夢 花閣,경북도 문화재자료 155호),송계 금인(琴識,1510~1593),삼 송 남몽오(南夢鰲,1573년 무렵),도승지 박선장(朴善長,1555~16 16), 도은 권호신(權虎臣, 1558~1629) 등 4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과향리의자제를가르친구만서원(龜灣書院,경북도문화재 자료154호)등많은유적이산재해있다. [반남박씨] 조선 성종때 충의위부사직을 지낸 박숙(朴塾)이 안동에 처음 입향 하였다. 숙(塾)이 안동에서 능성구씨 익명(益命)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그 처가 마을 부근인 가구에 안주하게 되었다. 인암 박승간과소고박승임형제가같이문과에급제하여더욱기반을 굳혔다.봉화에입향한박승간은군기시정을끝으로태백산아래 봉성에은거하였고,진사낙한정박승준은봉성창평에옮겨살았 다.그후손및방손이명호풍호봉성외삼봉화도처포저리등에 각기세거한다. [영해박씨] 영해박씨는 경북 봉화군 일대에 약 150여가구 700여명의 성손 들이 크고 작은 집성촌을 이루며 지역의 토성으로 자리고 있다. 운봉감무에 오른 돈옹공(휘 球)이 영해에서 안동 예안으로 이거 하여 세거지를 정한 후 그의 6대손에 전(澱)·흡(洽)·익(瀷) 등 4 촌 3형제가 임진왜란 당시 안동 예안 기사리에서 봉성지방으로 피신황무지를개척하고영해박씨의뿌리를내렸다. 금봉리의 입향조는 휘 전(澱)으로 字는 희청(希淸) 號는 기원 (岐園) 또는 계림(鷄林)으로 청송훈도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 就)하였다. 봉성문중입향조는돈옹공휘구(球)의6대손흡(洽)公으로자 (字)는희원(希源)호(號)는석림(石林)으로생부는절충장군부 호군을지낸휘지번(枝蕃)이고,양부는휘지남(枝南)이다. 봉성면 금봉리를 비롯하여 원둔과 외삼, 춘양, 관석과 서벽 등 지에살고있다. [죽산박씨] 문헌공만절당박원형선생의방후손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봉 화봉성면등지에살고있다. 뱚모범시군지부를 가다 경북봉화군지부 봉화군지부임원진이회관건립에이르기까지과정을설명하고있다,왼쪽에서부터시계방향으로박재창봉화읍회장,박시원부회장,박우선 회장,박대훈수석부회장 순 2019년11월,중국후베이성우한시에서처음으로 발생하여보고된 새로운 유형의변종 코로나바이 러스즉코로나19는우리일상모두를바꾸어놓아 버린끔찍한질병이었다.특히종친회에는치명타 가아닐수없었다.갈수록희박해지는성씨문화와 숭조사상그리고제사문화등숭조애종사업은손 을놓을수밖에없었던상황에종친들이한데뭉쳐 “新羅王孫 萬派一源”이라는 캐치플레이 속에 하 나가되어반듯한회관을건립하였다.이는상상할 수 없는 일로 아마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일이다. 이는회관건립의꿈을안고있는종친회에귀감이 될것이다. 봉화군은 오지 중에 오지이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봉화군은 산세가 수려하고 선비의 정신이깃들은예절의고장이다. 인구 3만 여명에1읍 9개면으로전체면적의83% 가오염되지않은 자연그대로의산림으로이루어 져있어서자연경관이빼어나고특산물이많다.특 히,도립공원으로지정된청량산을위시한명산과 국보및보물들이산재해있다.그리고그속에1천 여세대2천5백여명의박씨성손이산재해있기도 하다. 회관건립발대식부터준공식까지븣 기부자현황판을만들어700여성손들의고귀한뜻을기리고있다. 700여성손동참,10억여원모금 회관입구에박정희대통령께서쓰신휘호신라 왕손만파일원을표지석으로세워항상되새긴 다. 기르던소를내놓고아들과함께동참 박영석현종이집에서기르는소를내놓아모금운동에힘을보탰다. 선거운동한다는오해도받아 천년만년이어질회관으로 봉화군종친회연혁 관향별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