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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은은 1919년 3월 3일 고종황제 장례에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로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한 원용은은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만세운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면천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태극기와 선전물을 제작하였으며, 서울에서 강선필(姜善弼)이 가져온 독립운동노래를 등사판에 등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4시경 동문 밖 저수지 너머 골짜기에 면천초등학교 전교생이 집합하였다. 이때 높은 대에 올라 서울에서 본 만세운동의 광경을 말하며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준비했던 태극기와 선전물을 꺼내어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자리에 모였던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면천보통학교를 지나 경찰주재소 앞까지 진출했다. 이에 일본 순사가 강력히 진압하여 원용은도 박창신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31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형무소에서 4개월간 수감되었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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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원은 1915년 공주농업학교 졸업 후, 미곡상·사립보통학교 교사 등을 역임하던 중 1924년 3월 당진소작조합(唐津小作組合)에 가담하여 상무이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농민의 소작문제와 노동환경의 부조리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정학원은 1924년 4월 당진소작조합 대표로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발기회에 참가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최소임금 보장, 1일 8시간 노동, 소작료 인하 등을 위해 기관지를 발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충남 당진은 물론 서울, 경기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가던 정학원은 일경에 붙잡히기도 했으나,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1925년 8월 경기도청년연합회(京畿道靑年聯合會) 발기준비회에 참여하며 청년운동을 전개하고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12월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1928년 조선공산당 충남북도당 간부를 맡은 정학원은 평양에서 일경에 붙잡혔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등을 빌미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1년 12월 충남에서 조선공산당재건공작위원회(朝鮮共産黨再建工作委員會)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또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예심과정 중 옥중에서 중병을 얻은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33년 10월 7일 결국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