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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학(姜永學) 1864~미상/의병/건국훈장 애족장 대한제국에서 원릉(院陵) 참봉(參奉)으로 있다가 한말 정미의병 시기 손명선의진(孫明先義陳)에서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한국 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장력을 해체했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하면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정미의병항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강영학은 인문식(印文炮),이달성(李達成),김봉학(金奉學),이성순(李聖順) 등과 함께 충주 일대에서 의병과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8년 4월 20일경 충북 충주군 덕산면(德山面)과 태소원(太召院) 등지 에서 활동하며 복성면(福城面)에 머물던 중 충주경찰서에 탐지되어 4월 21일 새벽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1908년 12월 25일 충주구재파소(忠州區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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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식(金遠植) 1885~미상/임시정부/건국훈장 애족장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 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내무부(內務部) 참사(參事),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충청도 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4월 9일 중국 상해에서 대 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 임명되어 9월 15일 의원 면직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1921년 2월 28일부터 5월 20일까지 진행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8회 회의에 홍진(洪震)·신현창(申鉉唱)과 함께 충청도 의원으로 참석하였으며, 같은 해 9월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진행된 임시의정원 제9회 회의에 참석하여 상임위원회 제7과에서 활동하였다. 이어 홍진 등 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함께 태평양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발송하였다. 1922년 2월 8일부터 6월까지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10회 회의 에서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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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손(李昌孫) 1888~미상/의병/대통령표창 1908년 음력 3월 충북 충주군(忠州郡)에서 정낙인의진(鄭樂寅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의병장 정낙인은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 이후 창의한후 강원도 원주(原州) 일원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군에 패해 원주로 들어온 정봉준의진(鄭鳳俊義陳)에 합류 하여 연합의 병진을 편성하였다. 그는 400~500명의 의병을 휘하에 거느리고 1907년 12월 원주 상업산 (祥業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 하였다. 이창손은 1908년 음력 3월 25일 정낙인의 진에 참여 하여 짐꾼으로 운반 작업 등의 활동을 하다 충북 청풍 군(清風郡) 앙동(仰洞)에서 일본군의 총에 좌측 정강 이를 맞고 귀환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2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수종죄(暴動隨從罪) 로래(答)10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