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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⑭ 79 생이 아닐까? 나는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 길에 양진 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뻤다. 후손 양일룡 씨와 광주 시내 한 찻집에서 대담을 나 눴다. - 집안의 수난사를 들려주십시오. “간악한 왜정 35년간, 나라 없는 세월을 지내면서  풍비박산이 된 집안이 어디 우리 집안뿐이겠습니까?  당시 민족혼을 지닌 백성들은 모두 겪었을 수난이지 요. 양진여 의병장은 제 할아버님이십니다. 할아버 님은 3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양상기 의병장이 시고, 둘째는 필수로 일경의 고문 후유증으로 후사  없이 26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셋째가 공수로 제 생 부이십니다. 다행히 생부는 5형제를 두셨는데 저는  장남입니다. 제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큰 아버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할아버님 막내 동생 서영 할 아버님은 제 할아버님 의병부대에 호군장으로 활동 하다가 붙잡혀 3년 유배생활을 하셨지요. 이런 쑥대 밭이 된 집안을 추슬러 오신 분이 제 할머님(박순덕) 이십니다. 생전 할머님 눈은 생고막을 까놓은  것처 럼 새빨갰는데 왜놈에게 붙잡혀 가서 눈에 고춧가루 를 넣은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답니다. 제 할머님은  당신 남편과 큰아들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겪었 고, 둘째 아들이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고, 당신 조차 몸이 성치 못한 채 집안을 꾸려 오셨으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 다른 후손들과는 달리 조상의 기록을 다 찾으셨 습니다. “어릴 때 할머님으로부터 할아버님과 큰아버님이  의병장으로 매우 훌륭한 분이라는 말씀을 몰래 듣고  자랐습니다. 두 분의 기록이 광주나 대구 어딘가에 는 남아있으리라는 기대로 광주지방검찰청과 대구 고등검찰청 등 관계기관 문서 창고를 뒤졌지만, 아 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지문이라도  찾을까 하여 치안국 지문 감식계까지 찾아갔지만 허 사였습니다.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부산교도소 를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1971년 6월 22일, 부산교 대구감옥에 수감 중인 호남 의병장들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양진여 의병장, 독립기념관 제공) 후손 양일룡 씨(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