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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⑪ 79 라는 동양속담처럼, 의병 후손들인지라 서로 연대가 돈독했다. 내가 의병 전적지 답사 길에 가능한 한 후손을 만 나려 하는 것은 첫째는 그분들이 전적지나 조상의 역 사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요, 그 둘째는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왔거나 살고 있는지 살펴보고 자 함이요, 그 셋째는 역사 기록은 과거와 현재, 그리 고 미래가 이어져야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의병의 역사에 대해 깊은 연구가 없는 나로서, 그 분들 도움 없이‘구름에 달 가듯이’전적지를 둘러보 고 답사기를 발표한 뒤, 사실과 다르다고 후손들로 부터 항의를 받는다면, 매우 황당하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나 거리 문제 등 여러 가 지로 어려움이 많지만, 후손들을 만나고 그분들의 안내를 받고 있다. 오용진 선생은 초면이지만 첫 눈에도 의병장의 후 손답게 무인상(武人相)이요, 말씨도 매우 씩씩했다. 춘추를 묻자,“뭘 그런 것도 묻느냐?”고 웃으면서, 그 냥 일흔이 넘었다고만 했다. 이분의 손 전화에는 ‘독 도는 우리 땅이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등, 온통 ‘반일’로 무장된 분이었다. 이틀간 동행하면서 지켜 보니까 이분에게는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동안 광복회 의전부장, 총무부장, 대전 충남지부장 등을 역임했고, 당시 ‘대한민국 순 국선열유족회’ 부회장으로, 이런저런 봉사단체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바로 앞방에다가 여장을 풀고 다시 내 방으로 건너왔다. 고영준 선생도 자리를 함 께 했는데, 아무래도 화제는 항일 의병 이야기, 광복 회와 순국선열유족회나 일반 유족들 얘기로, 이 방 면에 지식이 적은 나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공부가 되고, 귀한 자료들이었다. 미군정 3년이 친일파들에게는 구세주였다 이야기 가운데는 내가 아는 것도 많았지만 잘 모 르거나 새겨들을 것도 있었다. 해방 후 곧장 이은 미 군정 3년이 친일파 무리에게는 구세주가 나타난 세 월이었다고 하면서, 바른 역사를 위해서는 언젠가는 미군정 3년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말 이었다. 사실 나도 한국전쟁 사진 수집을 하고자 미 국 버지니아 주 남쪽의 도시 노폭에 있는 맥아더기 념관에 가서 그 무렵에 찍은 사진들을 보고서 얼마 나 충격을 받았던가. 그때 함께 갔던 박유종(임시정 부 대통령 박은식 선생 손자) 선생과 나는 그 앨범과 비디오를 보고서 어찌나 그 처형 장면이 잔인한지 눈시울을 붉혔다. 범죄인을 하루만 풀어 두어도 증거를 모두 없앨 건데, 꼬박 3년 미군정 기간 동안 친일파를 풀어 주 었다. 그러니, 아니 친일파 무리들이 일제 강점기의 연장인 양 다시 완장을 차고, 아니 일본인들이 물러 오성술 의병장 손자 오용진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