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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미주 최대의 여성독립단체를 이끈 “임성실” 79 를 타고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다. 당시 이민 자들을 기록한 「하와이이민자명단」에는 남편 임 성택(Im, Seung Tak)의 이름과 임성택의 부인(Im, Seung Tak, wife)과 임성택의 딸(Im, Seung Tak, daughter)이라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임성실이란 이 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 부부가 1903년부터 시작 한 힘겨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일을 언제 청산 하고 본토로 진출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1905년 12월 6일치 『공립신보』에는 연조제씨(捐助 諸氏)라고 해서 의연금을 낸 기록이 보인다. 『공립신보』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공립협 회(共立協會)의 기관지이다. 임성택·임성실 부부는 1945년 4월 5일까지 『신한민보』 기록에만 무려 58 건에 이르는 각종 독립자금을 지원했으며 1905년 『공립신보』의 의연금까지 합하면 무려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조국 독립을 위한 자금을 아낌없이 지원 했다. 물론 남편 임성택 지사는 안창호 선생이 창립 한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했는데, 임성실 지사는 미 주지역 최초의 통합여성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 총 단장으로 활동하는 등 부부의 독립을 향한 열정은 활활 불타올랐다. 대한여자애국단 다뉴바지부 단장, 총단장 맡아 임시정부 지원 등 큰 활약 특히 부인 임성실 지사는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에서 신한부인회가 조직되자 5월 18일 한인부인회 대표 양제현과 신한부인회 대표 강원신 등 5개 지방 부인회를 통합하는 데 앞장섰다. 임성실 지사는 8월 2일 다뉴바에서 열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에 한성 선·이은기·이성애와 신한부인회 대표로 참석하여 합 동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대한여자애국단을 탄생시키 는데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1921년 8월 대한 여자애국단 다뉴바지부 단장으로 애국단 창립 2주 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같은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휴전 기념식 준비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미 주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독립운동가다. “증조할머니(임성실 지사)를 직접 뵙지는 못했지 만 증조할머니께서 조국독립을 위해 쏟은 헌신은 영 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증조할머니에 대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임성택·임성실 지사 부부의 ‘특별외교비의연금’ 《신한민보》  (1921.10.27자) 임성실 지사와 임지사의 가족(증손녀 머샤 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