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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한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향한 대장정 북로군정서는 중국당국의 간섭과 해산 압력, 일본군의 간 도침략 등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었던 왕청현 서대파 를 급히 떠나야만 했다. 독립군의 훈련과 항일무장투쟁을 위 해 러시아에서 무기구입을 한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가 서대파 본부로 돌아온 뒤에 9월 9일 제1기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거행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백두산 밀림지대로 진군하기 위해 부 대이동 준비를 시작하였다. 사관연성소 졸업생 삼백 명을 연 성대로 편성하고 대장에 나중소, 부관 최준형, 중대장 이범석, 소대장 이민화, 백종렬, 김훈 등이 임명되었다. 백두대장정에 돌입한 북로군정서가 십리평에서 출발하여 마반산(磨盤山) 자락을 타고 넘어가 신흥촌에 도착했다는 기 록대로 승용차를 타고 15킬로미터 정도를 달려 서대파를 지났 다. 그런데 마반산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왕 청현 방향으로 돌아 신흥촌을 거쳐 대감자에 도착하였다. ▶ 북로군정서 고난의 대장정, 송월평에 도착하다. 북로군정서 대부대는 대감자(大坎子)에 이르러 하루를 숙박하였다. 대감자촌에 머 무는 동안 군정서에 지원하는 젊은이들 50 명을 선발하고, 일본군에게 빼앗아 묻어두 었던 총과 탄약을 꺼내 수레에 실었다. 대 감자는 이범윤의 광복단이 창설되어 주둔 하던 곳이다. 십리평을 떠난 지 사흘, 새벽 2시 대감자를 떠나 용부촌(현재 도문시 석 현진)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위자구(현재 도문시 장안진)에 도착하여 숙박하였다. 위 자구를 떠난 군정서군은 의란진 신광촌에 도착하였다. 신광촌은 연길시에서 북쪽으 로 1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다. 북로군정서는 신광촌에서 부대를 다시 정비하고, 동불사 북촌을 거쳐 팔도구(현재 용정시 팔도구진)를 지나서 안도현 석문 차조구(현재 안도 현 석문진 중평촌)에 도착하였다, 차조구 토문령은 안도현에서 동남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 로 동네 앞쪽으로 시내가 흘러 연길 부르하통하와 합류한다. 석문산 줄기 가 뻗어 있는 곳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북로군정서가 차조구를 떠난 것은 10월 5일이었다. 차조구에서 천보산(天寶山)을 넘어 화룡현 이도구 에서 숙영한 뒤 묘령을 거쳐 10월 18일 송월평에 주둔하였다. 왕청현 마반산촌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태평촌 안도현 명월구진 천보산촌 매바위 왕청현 대감자촌 북로군정서 제 1기 사관연성소 졸업식 화룡현 송월평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