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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② 79 미술의 5개 부문을 설치했다. 김두용은 또한 1936년 1월 재일조선인 민족의 연 극 활동을 수행하고 재일조선인의 문화적 요구를 충 족시키며, 동시에 조선의 진보적 연극 단체 수립을 도모하기 위해 동경신연극협회의 합동 제안에 기초 하여 ‘동경예술좌(東京藝術座)’를 출범시켰다. 그는 위원장을 맡았다. 김두용은 여기에서 공산주의사상 을 기조로 한 진보적 민족 연극을 통해 일본에 사는 조선 민족으로 하여금 비판적 정신을 갖도록 지도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한 착취와 억압을 여실 히 이해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보통 조선 사람을 ‘해 방전선’으로 유인하려고 했다. 김두용은 김삼규 등과 동경예술좌를 주도했다. 해방 이후의 활동 김두용은 일제강점기에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 주도했다. 해방 이후 그는 조직가 로서도 활동했다. 1945년 10월 15, 16일 재일본조 선인연맹(이하 조련)이 결성되었다. 김두용은 김천 해, 박은철 등과 함께 조련의 결성과 지도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김두용은 조희준, 김정홍, 송성철, 박은철 등과 ‘정치범석방촉진연맹’을 결성하고, 위원 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9월 25일 김두용은 선두 에서 미점령군 총사령부에 출두하여 정치범과 사상 범의 석방을 진정하기도 했다. 이들은 김천해와 일 본공산당 간부의 석방을 요청했다. 마침내 10월 10 일 미점령군 총사령부는 정치범 석방의 지령을 내려 김천해 등이 석방되었다. 정치범 석방의 자리에서 김두용은 ‘해방운동 희생 자 구원회’를 대표하여 환영사를 했다. 이후 그는 조 련의 조직 변화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 45 년 10월에 결성된 조련은 11월에 조직변화가 생겼 다. 중앙위원회 구성원이 바뀌어 그가 조직 핵심에 섰다. 그는 정보부의 구성원으로, 신홍제(총무부), 배 철(지방부) 등과 조련 중앙에 포진하게 되었다. 그는 조련이 재일조선인의 대중적 지지에 기초하여 발전 하도록 노력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그는 조련 활동을 통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다시 수행했 다. 정치범 석방운동은 그의 존재가치를 보다 강화 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재일조선인 친일단체의 대표격으로 상 애회, 협화회, 흥생회, 일심회 등을 거론했다. 상애회 를 조선인이 중심이 된 반동단체라고 규정했다. 또 한 협화회는 일본지역에서의 조직과정에 주목했고, 일심회의 경우는 조련의 구성원이 직접 가입해 있던 사실을 강조했다. (이상의 글은 김인덕, 『일제시대 민 족운동가 연구』, 국학자료원, 2002를 주로 참조함)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훈처 연구원, 일본 와세다대 학 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 외국인연구원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과장, 성균관대 동아시 아학술원 연구교수, 한일민족문제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청암대학교 교수 · 재일 코리안연구소 소장, 재외한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식민지시 대 재일조선인운동 연구』, 『일본지역 독립운동사 연구』, 『강제연행사 연구』, 『재 일본조선인연맹 전체대회 연구』, 『오사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일상』, 『한국현 대사와 박물관』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