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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철기 이범석 79 철기는 이 학교 제12기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건해자기병연대(乾海子騎兵聯隊) 견습사관으로 임명 되었는데, 이것이 철기로 하여금 항일무장투쟁의 길 로 인도하였다. 1919년 10월, 이시영의 소개로 중국동북의 통화 현(通化縣) 신안보(新安堡)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 관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는 신민회의 해외 독립 운동기지 건설계획에 의해서 1911년 6월 10일 이철 영(李哲榮) · 이회영 · 이시영 · 이동녕 · 이상룡 · 김동삼 등 망명동지들이 설립한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독립군 양성소이다. 이 때, 철기는 오광선(吳光鮮) · 신팔균(申八均) · 김경 천(金擎天) 등과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는데, 이들이 양성한 독립군들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하다 한편, 철기는 1920년 4월 김좌진 장군의 요청에 의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교관으로 부임하 였는데, 그 해 10월 김장군이 지휘하는 청산리전투 에 참전하게 되었다. 청산리전투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안무(安武) 장군의 국민회군 등으로 편성된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청산리에서 일 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한 전투인데, 이는 봉오 동전투와 더불어 항일무쟁투쟁사에서 빛나는 전투 였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에 시작되어 26일까지 엿새 동안 밀고 밀리는 전투였는데,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섬멸시키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봉오동전투 에서 패함으 로써 자존심 을 크게 상 한 일본군이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군 을 일망타진 하겠다며, 5 천여 군사를 이끌고 화룡현 청산리로 진격해왔는데, 우리 연합 부 대를 지휘한 김좌진 장군의 치밀한 전술을 뛰어넘 지 못하고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우리 연합부대 는 일본군이 공격해올 것이라는 첩보를 미리 파악하 고, 골짜기의 좌우 산 허리와 산등성이에 2,800여 명 의 병력을 매복시켜놓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일본군은 전위부대를 앞세우고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왔다. 이 주력부대가 일본군 토벌대의 하나인 야마다(山田)보병연대였다. 한국광복군 간부 시절의 이범석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산리전투 현장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