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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5년 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했다. 오용진 선생은 그 길로 서울에 간다기에 일단 부자 의병장 취재를 거기서 마무리하였다. 막상 강원도 내 집으로 돌아오자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취재가 부족하여 마음이 몹시 불편하였 다. 내 집으로 양일룡 씨가 몇 차례 전화도 주고, 자 료도 우송해 주셨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편치 않아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하지만 광주에 다녀오고도 열흘이 넘게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기를 한 자도 쓰 지 못하였다. 일찍이 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서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 바깥세계의 사물)이니, 이 외물이 항상 이목(耳目)에 누(累)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한다”고, 눈과 귀로 보고 듣는 바깥세상의 사물에 경계하라고 말씀 하였다. 이즈음 나라 안팎이 매우 소란스럽다. 특히 나라 지도자 문제로 나라의 근본마저 위태롭다. 하기는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 바르고 어진 지도자만 있 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조만 하더라도 세종대왕 과 같은 성군(聖君)도 있었고, 연산군과 같은 부도 덕한 폭군(暴君)도 있었다. 백성들은 성군을 만날 때는 태평성대를 누렸고, 폭군을 만날 때는 학정에 시달리면서도 ‘반정(反正)의 날’을 기다리며 역사를 면면히 이어왔다. 나의 이 의병전적지 순례기는 오히려 지금 이 시 대에 가장 필요한 글일 것이다. 어떤 이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한 세기 전 단발령이 내릴 때와 같 은 시대착오의 얘기를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 겠다. 하지만 지구촌이 점점 가까워지는 국제화, 세 계화된 세상에 살수록 더욱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게 세계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지름길이다. 해외로 기행을 나가보면 자기 모 국이 번듯할수록 다른 나라 사람으로부터 대접받고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나는 다시 붓을 잡았다. 나는 부자 의병장 후손 양일룡 씨를 2007년 11월 7일에 이어, 그해 12월 8일 광주시내 한 찻집에서, 두 차례나 더 만났다. 내 생애 처음 듣는 부자 의병장 이야기를, 단 한 번만 듣고 글을 쓴다는 게 선열에 대 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인류 역사는 아버지 에게서 아들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게다. 국난을 당하여 아버지 와 아들이 함께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바친 그 모 습은 가장 숭고한 나라사랑의 모습이요, 거룩한 희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묘소(광주 백마산) 앞의 표지석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