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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4년 12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까지 도 우상으로 여겼던 의병장들이며, 기삼연 의병장은 한말 호남의병의 대표 인물이었다. 김죽봉은 김준 (金準, 金泰元)을 이르고, 안담살이는 안규홍(安圭洪),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포대 박도경(朴道京)을 말하 는 듯하다. 기삼연 의병장은 1851년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 봉진(奇鳳鎭)의 4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성재(省齋), 자는 경로(景魯)다. 전통적인 유가 가문으로서 일찍 이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 주가 빼어나 노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특 히 병서를 겸해 공부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필 법이 독특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장성 에서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는 스스 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군사들을 훈련 시키는데 놀랍게 능숙하여, “글이나 읽던 선비가 어 느 겨를에 군사의 일을 익혔을까?”하고 사람들이 감 탄하였다. 장성에서 나주로 행군하였다가 다시 광주로 가서 회합할 때, 성재 기삼연이 300명의 장성의병을 거느 리고 의진(義陣)에 도착하니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 러나 거사하려 할 즈음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 이 사령관 이겸제(李謙濟)와 관병 5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선유(宣諭 임금의 명령을 전함)하게 되어 기우 만이 의병 해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에 기삼연이 개탄하였다.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 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 늘, 이는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 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 두 왜놈이 될 뿐이다.” ‘호남창의회맹소’를 세우다 그는 독자적으로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02 년 2월 부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 회원의 밀고 로 탄로되어 결국 전주 진위대에 체포되었다. 그 날 은 딸의 초례 날이었다. 하객들이 모두 동요하였으 나 본인은 오히려 태연히 체포당하였다. 전주 감영 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평리원(平理院)에 이감되었다. 머리를 깎이기 직전 평리원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4개월 만에 탈옥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전남 영 광 수록산 석수암에서 다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후 의병부대를 편성,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 所)’를 설치하여 재기를 꾀하였다. 이때 편성된 의진 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대장 기삼연(奇參衍)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선봉(先鋒) 김준(金準, 金泰元) 참모(參謀) 김엽중(金燁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