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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4년 8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8월의 독립운동가 로 무장투쟁을 이어가던 신팔균의 죽음은 충격이 아 닐 수 없었다. 당시 임수명은 뱃속에 유복자를 임신 한 상태였다. 임수명은 남편의 전사 사실을 알지 못 한 채 8월 만삭의 몸으로 귀국하였다. 주변에서 충 격으로 인한 낙태를 염려하여 귀국을 권유했기 때문 이다. 귀국 후 임수명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유복녀를 낳았다. 신팔균과 임수명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위로 네 아들이 있었다. 장남 신현충은 청주김씨와 신팔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귀국 후 힘 겹게 살아가던 임수명은 10월 하순에 이르러 남편의 전사 소식을 확인하였다. 병 중이었던 셋째 아들마 저 사망하자, 임수명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음독 자 결하였다. 『조선일보』는 임수명의 귀국 과정과 자결 동기를 상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을 추서하였다. 이회영 일가 독립운동의 버팀목, 이은숙 이은숙(1889~1979)은 1889년 아버지 이덕규(李 悳珪)와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 났다. 한글과 천자문, 소학언해 등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20세인 1908년 10월 상동교 회 예배당에서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혼인 하였다.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남편 이회영 이 지어준 영구(榮求)라는 이명이 있다. 1910년 12월 일가 60여 명이 남만주의 서간도로 망명하자, 이은숙도 10개월 된 딸을 안고 함께 만주 로 떠났다. 이후 일가족과 함께 만주 류허헌(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 武 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하였다. 1917년 6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혼사로 귀국하였 다. 1912년부터 이미 국내에 있던 이회영이 1919년 베이징으로 가자, 이은숙도 2월 베이징으로 이동하 였다. 임신한 몸으로 남매를 돌보며, 독립운동가를 보필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1년에 수십여 차례 거처 를 옮겨 다닌 적도 있었다. 1925년에는 손녀 둘과 세 살 아들을 병으로 잃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결국 이 은숙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생활비 마련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 귀국해서도 그의 독립운동 자금지원은 계 속되었다.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자금을 이 회영에게 보내기도 했다. 1926년에는 자금 마련 일 이 경찰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8년부 터 경성부 병목정(竝木町)에 있는 고무공장(경성직뉴 공장)에서 일하였다. 퇴근 후에는 바느질로 장충동 일대 기생의 옷을 만들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아껴 베이징으로 보냈다. 1930년 들어 경찰의 단속으로 바느질마저 여의치 않자, 남의 집 가사를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1932년 10월 남편 이회영 이 세상을 떠났으며, 1935년 봄 아들 이규창이 상하 이에서 체포되었다.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형무소 에 갇힌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이은숙은 1940년 10 월 딸 이규숙 내외가 있는 만주의 신징(新京, 현재 長 春)으로 옮겨갔다. 하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은 숙은 이곳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뒤에도 고 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 고달팠던 삶을 『서간도 시종 기』에 담았다. 1966년 3월 탈고한 『서간도 시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