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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4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산로를 대학 재학 중 날마다 지나다녔다. 그러면서 도 동대문 옆 창신동 뒷산이 왕산이라 그렇게 도로 명이 붙은 줄로 알았다. 더욱이 내 고향 구미는 박정 희가 태어난 친일 고장이라는 주변사람들의 험담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미는 충절의 고장이라고 항변하 였지만, 내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내 고향 금오산 이 낳은 수많은 충절의 인물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영남학파의 우두머리 야은(冶隱) 길재(吉再) · 사육신 의 하위지(河緯地) ·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 그밖에 김 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등의 선비들이 금오산 자락에서 자란 학문과 충절의 고장이라고 들려주신 바, 이를 대단한 긍지와 자랑으로 여겨 왔다. 그런 충절의 고장이 왜 근현대사에는 그런 인물이 없을까 의문으로 지냈다. 그런 가운데 한국뿐 아니 라 중국(만주)에서도 절세의 항일 투사가 순국했다 는 사실을 알고는 마치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만난 듯 반가웠다. 귀국 후 이화여대 중앙도서관을 뒤지면서 관련서 적을 대출받아 골똘히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독립 기념관 발행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호 (1993년)에 실린 당시 성균관대학 동아시아학 술원 장세윤 교수가 쓴 「허형식 연구」논문을 읽었다. 그 에 따르면 허형식 장군은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대부분 북한 출신인데 견주어 남한 출신이라는 점, 항일연군에서 정치 이론과 사상, 대원 교육과 전략 전술 분야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 북한의 최용 건 · 김책 · 김일성 등과 대등할 정도로 항일 전선에서 고위 간부로 활약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장교 수는 특히 허형식 열사는 1941~42년 그 무렵 다른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 해 러시아로 월경했으나, 허열사는 한 번도 국경을 넘나든 적이 없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만주 땅을 지 키다가 토벌군에 장렬히 산화했다면서 정신면에서 는 다른 어는 항일연군 지도자보다 오히려 앞섰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 이듬해 나는 홀로 북만주 벌판을 헤매면서 허 형식 장군의 순국지(경안현 청봉령)를 찾아 희생기 념비 앞에 한 아름 들꽃을 바치기도 했다. 귀국 후 곧 장 장교수를 만나 함께 구미 현지를 답사했다. 마침 왕산의 후손 허호, 나의 구미중 선배의 안내로 금오 산 들머리 왕산 유허비를 찾았다. 금오산 들머리의 채미정. 고려 말~조선 초 유학자 길재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박도 촬영). 해질녘의 금오산. 누워있는 ‘성인(聖人)’의 형상으로 널리 알려졌 다(구미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