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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석성초 독립유공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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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춘흥(安春興) 1879.09.30-1955.10.30/의병/건국훈장 애족장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고종 황제의 특사를 문제 삼아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켰다. 순종황제를 즉위시킨 후 정미7조약을 강제 하여 국권을 강탈하였다. 일본 통감부는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 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장력을 해체하였다. 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촉발된 후기의병은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어느때보다도 강력한 무장력을 바탕으로 전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 금의군(禁義軍)이었던 안춘흥은 이강년의진에 신태원(申泰元)의병장과 함께 참여했다. 교련관을 맡아 의병을 훈련시키며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일찍이 전기의병에도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한 바 있었다.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1908년 음력 6월 4일 체포 될때까지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일대에 걸쳐 대규모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안춘흥은 1907년 7월 27일경 이강년의진의 후군장(後軍將)인 신태원 의병장의 휘하에 참여하여 영솔군(領率軍)으 로서 그해 8월 9일경까지 약 4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등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그는 1908년 9월 14일 공주지방재판소(公州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사면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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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만협(玄萬協)1862.08.17~미상 / 국내항일 / 대통령표창
1919년 3월초 천도교(天道敎) 충주교구장(忠州教區長)으로 활동했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 상황을 자세히 알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같은 달 10일 서울의 천도교 도사(道師) 이종석(李鍾奭)으로부터, 3.1운동 으로 투옥된 교주(敎主) 손병희(孫秉熙)와 간부들이 천도교 중앙총부의 재정 곤란을 구제하기 위해 계획해 온 자금 제공을 의뢰받고 이를 수락하였다. 이종석이 부탁한 내용은, 이전에 충주교구 내 교도들이 갹출한 기부금을 중앙총부에서 반환한 교당(敎堂) 건축 기부 금이 있는데 이를 다시 중앙총부로 송부해달라는 것이 었다. 14일경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忠州面) 연수리 (連守里)의 천도교 충주군 교구실(敎區室)에서 교도 정용진(鄭鎔鎭)과 함께 보관 중이던 건축기부금 215원을 중앙총부로 송부한다는 것을 교도들에게 전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로 했다. 이후 곧바로 충주군 앙성면 모점리 이종관의 집에서 반환에 반대하는 이종관 남규원 등을 대상으로 설득하였다. 16~17일경에는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 에서도 반대하는 교도들에게, 중앙총부에 납부할 1919년도 춘기연성미 명목으로 6원씩 낸 것으로 하자면서 같은 취지로 독립사상을 고 취시켰다. 이후 같은 해 4월 3일경 상경하여 이종석에게 자금을 건네주고, 손병희의 부인에게도 약간의 금액을 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6월 13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10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즉시 공소를 제기했다. 11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