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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⑭ 77 빨리 끝내야 할 처지였다. 그 사정을 아는 나는 시간 절약을 위해 묘소로 가는 차중에서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를 물었다. 할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상기는 의병장으로 젊은 나이에 순국하여 후 사(後嗣)가 없었다. 또 당신 부인 박순덕(朴順德) 여사 와 둘째 아들 필수(弼洙)는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폐 인이 되어 후손도 없고, 셋째 공수(空洙 양일룡 씨 생 부)가 다행히 후손이 있어 출계(出系 - 양자로 다른 집에 들어가 그 집의 대를 이음)로 대를 이었다고 한 다. 양진여 의병장 막내 동생 서영(瑞永)씨도 의병 투 쟁을 하다가 3년 유배형으로, 충남의 한 섬에서 귀양 살이를 했다고 하니, 온 집안이 항일을 한 탓으로 그 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가 빨리 망하 는 바람에 겨우 멸문(滅門)의 화만은 면했다고 속 깊 은 얘기를 해주었다. 항일 유족들은 잘 사는 사람들이 없다 “나뿐 아니라, 항일 유족들은 잘 사는 사람들이 매 우 드뭅니다. 복이 없으니 잘 살 수가 있겠습니까? 친일파들은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을 테지만, 의병 이 나 독립투사 후손들은 왜정시대 목숨 부지하기도 어 려웠습니다. 의병들 가운데는 후손도 없이 대가 끊 어진 집안이 숱하게 많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유족 들은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였고, 많이 배우지를 못 하였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지요. 거기다가 조상의 강직한 성품은 그대로 물려받아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니,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저 도 많이 못 배웠지만 제 자식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 하였습니다.” 양일룡 씨는 서예 학원을 다니면서 망월동 공원묘 지의 비석글씨를 10여 년간 쓰면서 입에 풀칠을 하 였고, 광복회 전남 사무국장을 맡았지만, 오래 전에 후배에게 물려줬다고 했다. 곧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묘소에 이르렀다.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191로, 백마산 양지 바른 곳에 부자의 묘소가 위아래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신은 몇 해 전까지도 낮이면 이곳에서 살다시피 나무도 가꾸면서 묘소를 돌봤다고 한다. 우리 일행 은 두 분 의병장 묘소에 엎드려 절을 드린 뒤 곧 하산 아버지와 아들 농사꾼(필자 촬영) 양진여(왼쪽) 양상기 의병장 초상화(양일룡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