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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⑫ 77 거실로 안내하고서도 묻는 말 외에는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 “교육을 못 받아(초등학교 졸업)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소장하고 있는 『성재 기삼연 선생 전』이라는 책을 꺼내 놓은 뒤 집안의 수난사를 간략 히 들려줬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일제 강점기는 ‘폭도 수괴(首魁)’ 후손으로 갖은 시 달림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런데 곧 아버지 가 6·25 전쟁 때 희생되어 어머니는 입에 풀칠을 위 해 당신 3형제를 데리고 친정살이를 하였다. 군에서 제대 후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는데, 남의 땅 10여 마지기를 소작하면서 살았단다. 그동안 농사 일로 열심히 산 덕분에 이제는 내 집도, 내 땅도 조금 가지 며, 2남2녀 자식도 오로지 농사로 키웠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당신은 나라에 대한 섭섭함보다 오히려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감사해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새 해는 서 산에 기울어 우리 일행은 돌아갈 차비를 서둘렀다. 집 앞에서 기 노웅 씨와 인사를 나눈 뒤 장성 으로 달렸다. “내 눈으로 보고 지난 얘기를 듣고 보니, 왜 얼굴을 내밀지 않 았는가를 알겠구먼. 홀엄씨 아래 거기다가 외가살이로 얼매나 힘 들었겠는가. 그 홀엄씨가 집안에 남정네들이 난세 에 나가 모두 비명에 죽으니, 자식들에게는 무지렁이로 그저 땅이나 파 묵으며 쥐 죽은 듯이 살라고 귀가 아 프도록 얘기했것제. 한 마디로 '지리산 까마귀'로 살 았네 그려.” 기 전교의 말이었다. 내가 ‘지리산 까마귀’란 말의 뜻을 몰라 되묻자, “먹을 것도 의지할 곳도 없는 천 애고아”라고 풀이해 주었다. 그러면서 아무 맥이 없 어 보이는 기노웅 씨의 진솔한 모습에 목이 멘다고 탄식했다. [기삼연 의병장 행장] 장하도다! 기삼연 1910년 경술국치 전후로 전라도에서는 다음의 동 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기삼연이 1895년에 보낸 서간(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