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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임시정부 버팀목 남편과 함께한 광복 아리랑 “홍매영” 77 중앙감찰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광복군의 대일 항전을 적극 지원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홍매영 지사의 남편인 차리석 선생은 임시정부 비서 장으로 환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1945년 9월 9일, 충칭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의 나이 65세였다. 백범 김구 주석은 선생을 두고 “차리석 선생은 해 외혁명운동가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 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 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평했다. 백범 은 1948년 6월 아들 신(信)을 보내 중국에 남아있던 선생의 유해를 봉환해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 예를 갖춰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했다. 귀국 후 홀로 어린 아들 키우며 온갖 고생 한편, 아버지 차리석 선생이 주검으로 고국에 돌 아왔을 때 아들인 차영조 선생은 고작 여섯살이었 다. “서울에 살다가 6 · 25 때 부여로 피난 내려가 아 이스케키통을 메고 부여 읍내를 다니던 시절, 너무 나 배가 고파 어머니에게 고아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난 2년 뒤, 나라는 6 · 25 한국전쟁에 휩싸였다. 서울에는 다 리 펴고 누울 공간 하나 없는 상황이라 8살의 소년 은 낯선 피난지 부여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 다. 그 당시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날품팔이를 해서 어린 아들을 키웠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어 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난 뒤부터 어린 차영조는 소년가장이 되고 말았다. 이후, 목숨을 부지하며 살 아남은 것만도 천행이라고 차영조 선생은 말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아버지 명함을 가지고 다니 는 유일한 사람, 아버지 묘소에 가장 많이 다니는 사 람일 겁니다.” 대담 중 차영조 선생은 당당한 목소리 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행복합니다. 천금 과 바꿀 수 없는 독립운동가 부모의 후손으로 그 어 떤 어려운 시기에도 항상 정도(正道)를 걷기 위해 몸 부림친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 낍니다. 어머니의 건국포장 추서로 어느 정도 제 소 원은 이뤄진 셈입니다.” 칠순의 아드님 차영조 선생 의 목소리는 회한으로 가득 찼다. 참고로, 차리석 선생의 첫째 부인 강리성 여사는 1899년 혼인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으나, 4남 은 어려서 일찍 죽고 차영애(1911~1995), 차영희 (1918~1966) 자매가 있었다. 중국에서 큰딸을 결 혼시키고 작은 따님과 함께 먼저 귀국하여 살다가 1961년 국내에서 숨졌고 차리석 선생과 함께 용산 효창공원에 합장으로 모셔져 있다. 한편, 차영조 선 생의 어머니인 홍매영 지사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 유공자 5묘역(묘비번호 331)에 잠들어 계신다.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 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 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동고동락 부부독립운동가 104쌍 이야 기』,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20권과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이윤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