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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 임천택 · 서병학 · 박창운 선생 77 3. 세 지사가 남긴 향기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은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 해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조직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무형의 한족정부(韓族政 府)’라 불릴 만큼 1910년대 독립 운동의 최고 기관이 었다. 1910년대 미주 지역에서 국민회는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정부 역할을 맡았다. 독립 운동의 지도 기관을 자임했다. 대한인국민회 지부가 멕시코에는 1909년, 쿠바에는 1921년 설립되어 한 인의 이익을 옹호하고 독립 운동을 지도하는 기관으 로 역할을 다하였다. 멕시코에 이민 온 세 사람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 에서도 대한인국민회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자 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쏟았다. 이들은 멕 시코 지방회에서는 한 사람당 1페소의 월 연금을 거 리낌 없이 정기적으로 납부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 에 의무금·가옥채·기계채 등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 다. 국민회에 필요한 각종 특별의연을 모집하고, 동 맹 저축, 애국 동맹금을 거둘 때 기꺼이 돈을 냈다. 1919년 1월에는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을 위해 특별의연(特別義捐)으로 1인당 20페소 이상을 거두 었다. 3·1 운동 기간에는 메리다 지방회 소속의 한인 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 총회에 보낸 돈이 약 1,000달러가 넘었다. 메리다 지방회 설립 직후 일어난 멕시코 혁명 의 영향으로 한인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이 기 간 멕시코 한인 사회에는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이 루어졌다. 한인들은 심각한 생활난과 경제적 상승을 위해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그 가운데는 경제적 상 황이 훨씬 좋은 미국으로 간 사람도 있었고, 1921년 에는 쿠바로 집단 이민을 떠나기도 하였다. 임천택, 서병학, 박창운은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민 간 대표 적인 지도자들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와 쿠바 지역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상호 단결을 통 하여 한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함에 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쏟 았다. 세 사람은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을 국민회를 중심 으로 단결시켰다.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지도력 을 발휘했다. 나아가 독립운동을 일생에 거쳐 적극 후원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숭무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을 양성하여 원동 지역의 독립군으로 보낼 계획 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무장투쟁 분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