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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독립운동가 • 곽낙원 · 임수명 · 이은숙 · 허은 여사 77 곽낙원은 임시정부에서 든든한 조력자로써 존재 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함께 생활했던 정정화(鄭 靖和)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말없이 앉아 계신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우 리의 큰 기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회고하였 다. 또한 “매섭고, 대범하고, 절제되고, 소박한 어른 으로 존경과 공경을 받았다”는 회고도 보인다. 평소 절약을 권면하였고, 돈이 생기면 임시정부를 지원하 였다. 사후 충칭의 화상산(和尙山)에 안장되었다가, 1948년 국내로 이장되었으며, 현재 현충원 애국 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만주 항일투쟁을 지원하고, 순사(殉死)한 임수명 임수명(1894~1924)은 1894년 충북 진천에서 출 생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개성으로 추정된다. 14 세 무렵 보통학교를 마치고 집안일을 도왔다. 16 세 때 양친을 여의고, 18세인 1912년 서울 모(某) 병 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이 무렵 신팔균(申八 均, 1882~1924)을 만났다. 당시 신팔균은 대동청 년 당(大東靑年黨) 활동을 하고 있었다. 대동청년당은 1909년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안희제(安熙濟)·윤세 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애국청년들 과 함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 시점은 1914년 5월 10일로 기록 되어 있다. 결혼 후 신팔균은 만주로 떠났다. 임수명 은 개성에 머물며, 남편의 동지인 신백우(申伯雨) · 서 세충(徐世忠) · 엄익래(嚴翼來) 등에게 서신과 비밀문 서를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1년 무렵 신팔균이 일본 군용 지도를 입수하기 위해 잠 시 국내에 들어왔다. 남편이 떠날 때 임수명도 함께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했다. 기록마다 서로 달라서 정확한 망명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망명 후 임수 명은 베이징과 만주를 오가는 힘든 삶을 이어가며, 남편의 독립운동을 내조하였다. 그런데 1924년 7월 2일, 신팔균이 만주 싱징현(興 京縣) 왕칭먼(旺淸門) 이도구(二道溝)의 산악지대에 서 중국 마적과 교전 중 순국하고 말았다. 김좌진(金 佐鎭) · 홍범도(洪範圖) · 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충북미래여성플라자(A동 1층)에 위치한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 의 임수명 전시 공간(동양일보 제공) 임수명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