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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 • 채찬 · 김창균 · 장창헌 · 이춘화 선생 77 군 모집에도 힘썼다. 장창헌(1884-1924)은 일찍부터 대한통의부 의용 군에 참여하였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 주만참의부(약칭 참의부)에 참여했는데, 참의부는 무장투쟁을 통한 국내진공 작전에 주력하였다. 주로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의 의주·초산·강계·선천·위원· 태천·용천·자성 등 일제 주재소 습격과 밀정 처단을 수행하였다. 이는 참의부 독립군 가운데 평안도 출 신들이 많아 지리에 익숙했으므로 게릴라전을 수행 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1924년 5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그의 치적 을 선전하기 위해 국경지역을 순찰한다는 첩보를 참 의부에서 탐지하게 되었다. 참의장 채찬은 제3소대 장 장창헌에게 총독을 사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명 령을 받은 장창헌은 제1소대장 한웅권(본명 이의준) 을 비롯한 참의부 독립군을 인솔하고 순시선의 속도 가 낮아지는 압록강변 절벽 위에 잠복하였다. 이윽 고 두 척의 순시선이 나타나자 참의부 독립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아쉽게도 총독 저격에는 실패했으나, 독립군들은 부대를 나누어 분산한 후 일제 수색대의 경비망을 뚫고 유유히 부대로 복귀하 였다. 1924년 7월에는 이백파·이성빈·이춘화 등 대원을 인솔하고 강계군 종서면 황청동으로 진출하여 적과 교전 중 친일파 한시항·김성로· 이기화를 사살하고 가옥을 소각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전투 에서 장창헌은 이춘화·이용연·김용규 등과 함께 전 사 순국하였다. 이춘화(1896-1924)는 일찍부터 장창헌과 함께 대 한통의부에 참여하는 등 무장투쟁의 동지로서 생사 를 함께 했다. 1924년 5월 19일 사이토 총독 일행이 국경을 시 찰한다는 첩보를 탐지한 참의부에서는 장창헌에게 총독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춘화는 저격 조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평북 강계군 마시탄(馬嘶 灘) 여울의 건너편인 집안현 사랑곡 팔합목 절벽 위 에 은밀히 매복하여 총독 일행을 기다렸다. 두 척의 순시선이 나타나자 독립군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 하였다. 불행하게도 사정거리가 멀어 총알은 압록 강 물위에 떨어지고 총독 일행은 혼비백산하여 도주 하였다. 이춘화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부대를 분산한 후 일제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부대로 복귀하였다. 이 저격사건 후 우리 독립운동계는 크게 고무되 었다. 상해의 『독립신문』에는 ‘적 수괴 사이토를 습 격(敵魁 齋藤을 襲擊 !)’이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되 었다. 육군주만참의부와 독립전쟁의 전개 서 ·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1920년 10 월 청산리대첩을 치른 후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효과 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단체의 통합이 절실했다. 이 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1922년 8월 30일 결성된 ‘대한통의부’다. 산하 독립군 명칭은 ‘대한통의부 의 용군’이었다. 통의부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 결성되었기 때문에 지도자들 간에 공화(共和)와 복벽(復辟)이라는 이념 의 대립, 군권(軍權)과 인선(人選)을 둘러싼 내부갈등 이 계속되었다. 복벽계는 전덕원을 중심으로 의군부 로 분립되었다. 이러한 내부갈등에 회의를 느낀 통 의부의용군 5개 중대 가운데 4개 중대가 오로지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