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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⑤ 77 다고 눈물로 사과했던 것이다. 이후 15세에 고향을 떠나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여러 분야 공부를 했다. 박열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사상가들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다양한 사조와 관련된 정보를 얻게 된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세계사조 관련 각종 서적을 탐닉했다. 1919년 2월 고종(광무황제)이 갑자기 서거하자 일 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기에 당시 국제 정세에 부응하여 전민족적 항일운동인 3 · 1운동이 일어났다. 3 · 1운동 당시 시위운동 준비과정에서 경 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박쾌인과 김백평이 대표로 참여했다. 이 때 박열은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3 월 1일 당일 박열은 박노영과 탑골공원으로 가면서 시위를 선도했다. 이들은 오후 2시까지 인사동, 낙원 동, 관훈동 일대의 길거리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 이렇게 박열은 경성고보생들의 독립만세 시위운 동을 선도했다. 이후 그는 김백평, 박쾌인 등과 같 이 후일을 준비했다. 박열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 해 고향 문경에 돌아온 이후 친구들과 함께 태 극기 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문경 의 3 · 1운동에 참가했던 것이다. 박열은 친구들로부 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등의 만행을 전해 들 었다. 이후 그는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행을 결 심하고, 경성역에서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1919년 10월 도쿄(東京)로 가는 배를 탔다. 박열의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운동 박열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등을 비롯한 아나키즘과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 크로포트킨은 다양한 저작을 통해 아니키즘은‘인류의 진보를 위한 사상’이라고 했다. 박열 등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주관하는 사상 단체에 적극 참가했다. 여명회(黎明 會), 코스모스구락부, 자유인연맹(自由人聯盟), 신인 회(新人會), 일본사회주의동맹(日本社會主義同盟), 효 민회(曉民會), 건설자동맹(建設者同盟), 개조동맹(改 造同盟) 등에 조선인 학생들이 참여했다. 경상북도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박열(1902~1974) 영화 ‘박열’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