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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③ 77 출신 조몽구를 만나서 제자로 삼았다. 당시 공립학교 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제주시 구좌읍 월정 리에 있는 중앙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의 전신)에서 근무했다. 1925년 3월부터 1927년까지 교장을 지냈 다. 1919년 제주도 3 · 1운동 당시 이를 지도했다. 김문준은 1927년 일본 도항 이후 재일본조선노동 총동맹에서 활동했다. 특히 김문준은 1929년 7월에 제주도 출신 소년들을 중심으로 오사카 조선소년동 맹을 조직했다. 1930년 제주도-오사카 사이의 여객 선을 취항시킨 동아통항조합의 설립에 관여했다. 그 는 일본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배로’라는 구호 아래 제주 출신인이 오사카와 제주를 왕래하기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 결성을 주 도했으며, 1930년 4월에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후 시키마루(伏木丸)를 취항시켰다. 당시 일본 경찰은 “1930년 8월 17일 오사카에서 …쟁의(爭議) 비밀지도부 회의 중 거괴(巨魁) 김문준 (당시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 상임) 등 조선 인 5명과 일본인 3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문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출감 후인 1935년 6월 15일에는 오사카에서 한글신문이었던 『민중시보』를 창간해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옹호에 앞장 서기도 했다. 그 뒤 일본공산당 재건운동에 참가하 고, 혁명가구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인 조직을 지도했 다. 일본인 운동과 연결을 도모하며 인민전선 결성 에 노력했다. 1936년 5월 25일에 수감 생활 중 폐결핵이 악화 되어 오사카 도네야마(刀根山)치료소에서 치료하다 가 오사카 시내에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조선 인 · 일본인 노동계가 합동으로 시신을 유리관에 안 치, 오사카시 노동장(勞動葬)으로 엄수되면서 시가 행진을 감행했다. 그리고 해방운동희생자무명전사 의 묘에 합장되었다. 일본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준 시신을 제주도로 운구하겠다고 하자 일본 경찰이 막 았다. 당시 김문준의 문하생이었던 김광추가 대표로 운구위원이 되어 조천으로 유해를 옮겨 도민장(島民 葬)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조 천리 면장(面葬)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안세훈, 김유 제주 조천 3 · 1독립운동기념탑 (한국기독공보 제공)김문준(1893~1936) 일본에서 제작돼 김문순 묘에 세워 진 김문준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