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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② 77 선인 민족운동의 한 가운데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회에서의 활동 1920년대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흐름 속에서 김두용의 여러 족적이 보인다. 그는 당시 문예운동 을 하던 임화(林和), 한식(韓植), 이북만(李北滿), 조중 곤(趙重滾) 등과 조직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1926 년 11월 도쿄(東京)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임무 를 창작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프 롤레타리아 계몽을 실행하기 위해 예술을 무기로 하 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27년 3월 잠정기관으 로 제3전선사를 조직했다(任展慧, 『日本における朝 鮮人の文學の歷史-1945年まで-』, 法政大學出版局, 1994, 참조). 이 조직은 카프의 재조직 후 자진 해체 하고, 『개척』의 동인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 동맹 동경지부로 전환하기도 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는 10월 2일 창립대회를 신간회 동경지회관에서 개최했다. 이어 서 조선어 기관지로 『예술운동』을 1927년 11월 15 일 창간했다.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김두 용 이었다. 당시 이 조직은 ‘전위양성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 구성원인 김두용을 비롯해 이북만, 고경흠, 최병한, 황양명, 조중곤, 이우적, 장준석 등은 재일조선인 민족운동 단체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 다. 이들은 일체의 투쟁을 정치투쟁이라고 간주하고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을 일선에서 선도했다. 무산자사에서의 활동 김두용의 경우 이론지형을 선도했다. 그는 ‘재건고 려공산청년회 일본부’는 구역국 회의에서 논의, 정리 된 활동방침에 따라 선전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선전 활동을 위해 신문과 잡지의 출판위원으로 김두 용은 이북만과 함께 했다. 한편 일본으로 간 김치정, 임인식 등은 1929년 4 월 이래 ‘재건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와 별도로 당재 건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위의 조직은 별도로 존 재했다.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헤게모니를 둘 러싸고 김두용, 고경흠(高景欽) 등의 그룹과 정희영, 김두용과 함께 활동했던 고경흠의 서대문형무소 수감 직후 모습 (1931.10.2,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김두용과 논전을 벌였던 김기진이 치유지법 위반 혐의로 종로 경 찰서에 체포된 모습(1931.10).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