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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2024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발굴하여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한국광복 군총사령관병 소비합작사 문서, ’시안시거류 한교조 사표(西安市居留韓僑調査表)’, ‘충칭시거주 한교표(重 慶市居住韓僑表)’ 등이 공개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 는데, 홍매영 지사의 독립운동 사실도 이들 문서에 의해 확인되었다.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홍매영 지사의 남편인 동암 차리석(東岩 車利錫, 1881~1945, 1962년 독립장) 선생은 평북 선천 출 신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신민회 에 가입했다. 105인 사건(일명 신민회사건으로 불린 다. 1911년 일제가 저항적인 민족주의 및 기독교계 항일세력 탄압을 목적으로 데라우치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하여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 으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또한, 3·1만세 운동 때 주 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활약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정원 의 원으로 재직하면서 도산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 의 개최를 통한 임시정부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이 어 이동녕·김구·안창호·여운형 등 3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했다. 시사책진 회는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간의 이 견을 조정하고 각 방면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하여 최 선의 방책을 모색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한편, 선생 은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 東委員部)에 가입하여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년 인재 양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흥사단 원동위원 부에서는 청년들의 공론(公論)을 도출하기 위해 강론 회를 수시로 개최하고 다양한 강연과 토론을 진행하 여 단원 간의 방략과 논의를 합치시켜 나갔다. 임시정부가 창사(長沙), 류저우(柳州) 등지를 거쳐 1940년 충칭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임시정부 직할 부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1945년까지 5년여 동안 각종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차 리석 선생은 갖은 고초와 난관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켜냈다. 충칭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과 차리석 선생이 1945년 9월 9일 환국 준비 중 과로로 쓰러져 숨지 자 9월 12일, 중국 충칭 땅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앞줄 가운데 아기 를 안고 있는 분이 부인 홍매영 지사이고 품에 안긴 아기가 차영조 선생이다. 효창원에 모셔진 아버지 차리석 묘소에 어머니 홍매영 지사의 건 국 포장증을 바치고 절하는 아드님 차영조 선생(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