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age


75page

최명희(崔明熺) 1892.09.09~미상 /3.1운동 / 건국포장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구한국 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시위운동'이 전 개된 것을 알게된 최명희(崔明嬉)는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리하여 3월 27일 금가면(金加面) 도촌리 (島村里) 엄용복(嚴龍福) 집으로 찾아가 각 지방에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으로 충주에서도 장날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쳐야 한다고 권유했다. 다음날인 3월 28일에는 엄정면(嚴政面) 목계리(牧溪里) 김종태(金鍾台)에게 독립만세 를 외치는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3.1 운동 참여 독려 활동으로 인해 최명희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충주헌병 분대에 구류되고 신문조사를 받은 후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되었다. 5월 31일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 다. 6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여 7월 16 일 공소 사실의 '증거 불충분'으로 원 판결 취소가 결정되어 징역 6월로 감형 선고를 받았다. 9월 25일 고등법원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6월형이 확정되고 청주감옥 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75page

이성순(李聖順) 1869~미상 / 의병 / 건국훈장 애족장 1908년 4월 충북 충주일대에서 의병 소모장 강영학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한국 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장력을 해체하였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하면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정미의병항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성순은 손명선의 지휘 아래 강영학 인문식 이달성 김봉학 등과 함께 충주 일대에서 의병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4월 20일경 충북 충주군 덕산면 및 태소원 등지에서 활동하다 복성면에서 머물던 중, 4월 21일 새벽 충주경찰서 경찰의 습격을 받고 교전 중 체포되었다. 1908년 12월 25일 이른바 내란 및 강도죄로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75page

정여선(鄭與先) 1855~미상 / 의병 / 건국훈장 애족장 충청북도 충주 출신으로 1907년 10월 11일에 의병장 김상한의 부하로서 소모장이 됐다. 정여선은 김상한 으로부터 화승총 1정(挺)과 탄약을 지급받아 휴대하고 12월 21일까지 충주·청풍·단양 등 각 군을 순회하며 의병 동지 5명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충주군 덕산면 영남, 단양군 동면 색남 등지에서 의병들과 함께 토벌대순사 약 20명과 교전하는 전투를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민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며 활동 하던 중에 1908년 3월 15일 청풍군 원남면 수산리 에서 헌병에게 체포됐다. 정여선은 체포된지 1여 년이 지난 1909년 4월 2일 공주지방 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 죄명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