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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김상옥·김춘원 형제독립운동가 어머니 “김점순” 75 사를 후세대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김태순 여사의 막내 아드님인 이석주 씨는 나아가 김상옥 의사 집안의 독립운동 역사 또한 잊히지 않 기를 바랐다. “70 노모와 13식구가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창 신동 487번지의 철공장과 집을 통의동 74번지의 '광 명사'라는 곳에 일금 5천원에 저당 잡히고 빚을 썼는 데 이자도 못 갚아서 결국 경매에 넘어갔고 낙찰받은 일본인(鷺板)은 단돈 50원을 주면서 18일까지 집을 비우라고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정사정하 여 22일까지로 연기받았는데 막막한 실정이라 한다.” -『동아일보』 1927년 4월 20일 ‘김상옥 사후 쇠잔 한 가정, 암담한 일가의 장래’- 이는 김상옥 의사 사후 5년 되는 시점의 기사다. 그러나 생활이 어렵기는 김상옥 동생 김춘원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춘원의 큰따님인 김태순(97 세) 씨에게 대담을 마치면서 지금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았다. “나이가 많다 보니 아픈 곳 이 많아 병원비와 약값이 많이 든다. 2년 전까지 보훈 지원금으로 월 35 만원 씩 지급되던 돈이 이제 월 5만 원 밖에 나오지 않 는다. 막내아들도 여의치 않은 살림에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할 뿐이다”라고 하며 말끝을 흐렸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기자의 손을 잡은 여사의 주 름진 손이 꺼칠하다. 이제 여사를 기다려 줄 이승에 서의 시간이 많지 않다. 이 시대의 진정한 독립투사 김점순 할머니, 김상옥 큰아버지, 김춘원 아버지를 둔 독립운동가 후손이 마지막까지 약값 걱정없이 편 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되길 빌어본다. 낙후된 주 택가를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왜 봄인데 비바람은 이리도 겨울처럼 불어대는지, 아직도 봄은 멀기만 한 듯 느껴졌다.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 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 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동고동락 부부독립운동가 104쌍 이야 기』,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20권과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이윤옥 김태순 여사, 여사의 아드님 이석주, 필자(왼쪽부터)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 전시장에서 의 김태순 여사(이상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