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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관문(聞慶關門)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高思葛伊城(고사갈이성)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기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떄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떄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정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은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은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