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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길러낸 억척 어머니 ‘곽낙원’ 75 는 철도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중국 단둥(丹東, 당시 안둥)에서 철도로 따렌(大 連)으로 가서 선편으로 상하이로 들어가는 계획이었 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검문검색이 심해 무사히 중 국 땅을 밟을 때까지 곽 지사는 손자들과 가슴을 졸 여야 했다. 곽 지사는 측면 지원해주는 동포와 1차 난관을 무사히 통과하면 ‘돈 송금했음’이라는 전보 를 쳐서 마중 나올 사람과 은밀한 소통을 했는데 만 일 일제 관헌에 잡히면 ‘돈 도착하지 않아 곤란함’으 로 정하고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여 상하이행 승선 까지 성공하게 되면 ‘돈 받았으니 안심할 것’이라는 전보를 치기로 약속하고 상하이에 있는 아들 백범을 찾아 길을 떠났다. 어린 손자 둘을 데리고 넓디넓은 중국 땅을 헤맸 을 곽 지사의 모습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입을 것, 먹을 것이 넉넉지 않은 시절에 교통편마저 여의치 않은데다가 아들 백범은 사상 유례없는 당 시 돈 60만 원(현재 가치로 200억원)의 현상금이 걸 린 상태였으니, 이들 가족의 운명이 어찌 풍전등화 가 아니랴! 그래도 하늘이 이들을 도와 무사히 자싱 (嘉興)에 도착했다. 백범은 어머니 곽 지사, 두 아들 과 해후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과정을 두고 신용 하 교수는 “곽낙원 지사의 치밀하고 정확한 판단과 여걸다운 담대한 행동으로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망 을 뚫고 고향 탈출, 중국 망명에 성공했다”라며 곽낙 원 지사의 침착하고 지혜로운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곽낙원 지사가 조선을 성공적으로 탈출한 사실을 안 조선총독부는 경무국을 중심으로 발칵 뒤집혔음 은 물론이고 일제의 상하이 총영사관, 텐진 총영사 관, 칭다오 영사관 등 산하 각 경찰서를 동원하 여 곽 지사를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했음이 『조선통치사 료』 제8권 (일본 동경 1971년 판)에 극비문서로 기록 되어 있다. 반평생 임시정부와 고락을 함께 해 곽낙원 지사는 반평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고 락을 같이한 ‘임시정부의 대모(代母)’로 꼽힌다. 자 싱(嘉興)에서 아들 김구를 만났지만, 함께 지낼 형편 이 못되자 곽 지사는 이후 줄곧 임시정부의 요인들 과 함께 생활하며 일본군을 피해 피난생활을 거듭해 야했다. 곽 지사는 임시정부와 동고동락하면서 난징 (南京)에서 창사(長沙)를 거쳐 광저우(廣州), 류저우 (柳州)를 지나 1939년 4월 다시 충칭(重慶)으로 향하 어머니 곽낙원 지사 묘비에 선 백범, 국사편찬위 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