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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독립운동가 • 곽낙원 · 임수명 · 이은숙 · 허은 여사 75 여성 스스로 여성단체를 조직하 여 여성을 계몽하고, 단결을 다졌 다. 1923년 무렵부터는 사회주 의 여성해방론이 소개되기 시작 했다. 이를 수용한 여성 사회주의 자들은 여성해방과 더불어 민족 해방운동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7년에는 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기관인 근우회를 조 직하여 계몽운동과 여성 권익향 상 운동, 더불어 항일운동을 전개 하기도 하였다. 1931년 이후에는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운동, 그리고 반제 반전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나라 밖에서 투쟁한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의열 투쟁, 무장 항일투쟁 지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 국광복군 참여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만 주(중국 동북지방)와 중국 관내로 망명한 여성들은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며, 함께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국광복의 제단에 오롯이 자신의 삶을 바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모(大母) 곽낙원 곽낙원(1859~1939)은 황해도 재령에서 곽창훈의 딸로 태어났다. 14세 때 해주 백운방 텃골에 살던 김 순영(金淳永)과 결혼하였다. 17세에 이르러 아들 김 구(金九, 1876~1949)를 낳았다. 20세의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 김구의 항일투쟁 여정은 곽낙원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처 단한 일로 투옥되면서 2년여의 옥바라지를 하였 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11년 또다시‘안악사건’으 로 투옥되어, 1915년 8월 가출옥 때까지 옥바라지를 지속하였다. 일본식 헤어스타일 때문에 기생이라고 오해받은 경성여자고교 학생들의 3·1운동 첫 날 만세시위 모습(독립기념관 제공) 배화여고 재학중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독립 만세를 부 르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배화여고 6명의 여학생들. 윗줄 왼 쪽부터 김경화ㆍ박양순ㆍ성혜자ㆍ소은명ㆍ안옥자ㆍ안희경 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를 당시의 모습 (국사편찬 위원회,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