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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 • 채찬 · 김창균 · 장창헌 · 이춘화 선생 75 사이토 저격의 주역들 – 채찬, 김창균, 장창헌, 이 춘화 채찬(미상~1924)은 일 찍이 이강년 의병장을 따 라 의병 투쟁을 하다가 만 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 학교를 수료하였다. 졸업 생들과 함께 통화현 쏘배 차(小北岔 )의 백서농장에 서 농감(農監)으로서 둔전 제를 통한 군대를 양성하 였다. 이후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주력하면서 주로 백광운(白狂雲)이라는 이 름을 사용했다. 1920년 서로군정서 본부가 길림(吉林)으로 이동 한 후에도 남만주지역에 남아 신용관(신광재)·김소 하(장기초) 등과 함께 국내에 진입하여 적 기관 파괴 와 밀정 처단에 힘썼다. 1921년 신용관이 병사한 이 후에는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 는 한편, 상해의 『독립신문』에 자금을 지원했다. 남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된 이후에는 통의부의용 군 제1중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통의부가 의군부 와의 갈등으로 대립하게 되자 채찬은 의용군 제1중 대장으로서 오로지 무장투쟁에만 전력한다는 입장 아래 각 중대의 중지를 모아 스스로 대표의 일원이 되어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방문하고 참의 부를 임시정부 소속으로 편제시켰다. 그는 제1 중대 장으로서 참의장을 겸임하고 무장투쟁에 매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24년 5월 조선총독 사이토가 국경지방을 시찰 한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장창헌(張昌憲)에게 그를 사 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사이토의 저격에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은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측으로서는 심각 한 충격과 함께 그들이 큰 소리 치던 총독정치가 실 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이토 저격사건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인 1924년 9월 21일 채찬은 참의부 본부 주둔지에서 무장투쟁 단체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피 살되고 말았다. 그의 피살 사실은 『독립신문』에 발표 채찬의 사진 선언서 추도문이 실린 독립신문 제177호(1924.10.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