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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 유기동 · 김만수 · 최병호 선생 75 이후로는 모든 정치적 범죄와 관련해 재만 한인에 대해 [일본 측이] 강을 건너와 체포하는 일은 허락하 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한편으로는, 계획이 치밀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안타깝게 여기거나, 일본 경찰 한 명 없앤 다고 독립군 의사를 세 명이나 잃게 된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 상룡은 “이는 생과 사를 넘어서는 세 분의 마음을 모 르는 일이다. 이 세 사람은 독립이 속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해 되는 것을 없 애 민족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독립을 미리 준비해 가도록 살신성인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의(義)란 마땅함[의(宜)]이기도 하다. 마땅히 없애야 할 것을 없앴다면 그 공로를 따지지 않으며, 마땅히 죽어야 할 곳이라면 죽더라도 그 뜻을 바꾸지 않는 것, 이것이 의사일 것이다”라고 추기하여, 쿠니요시 를 단번에 처단한 공적과 항복하지 않고 순국한 의 기(義氣)를 칭찬하였다. 독립군의 유기동 · 김만수 · 최병호 세 용사는 일제 에 추호도 굴복함이 없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용 감무쌍하게 맞서며 일신을 민족 독립과 자유의 제단 에 바쳤다. 이상룡의 말처럼 실로 ‘살신성인’의 길을 택해 걸어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집단적 · 조직적 수 준의 무장투쟁 이상으로, 개인적 결단과 남다른 용 기로 자기희생을 불사하고 껴안은 일대 의거(義擧)였 다. 그래서 의열투쟁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진정한 의사의 길을 걸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었다. 앞서 1920년부터 남만주에서 성립해 맹렬히 활 동하던 벽창의용단(碧昌義勇團) · 의성단(義成團) 등 의 의열투쟁 단체들과 더불어 하얼빈 3의사의 의거 도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진영에 큰 자극과 교훈을 남겼다. 한동안 흐트러졌던 전열을 재정비하고 자세 를 가다듬은 독립운동가들과 조직들이 1924년 6월 이후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연이어 발족시켜 무장독립운동의 새 국면을 열어가는 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3의사가 한날한시에 수행해낸 의로운 혈전의 공 훈과 그 의의를 기리고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의사 합전(合傳)」을 남긴 석주 이상룡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 무령 시절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