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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② 75 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구제(舊制) 중학과 구 제(舊制) 3고(三高)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미학과를 중퇴하였다. 신인회(新人會)에 가입하였고, 반제동맹 (反帝同盟)에서도 활동하였다. 이후 제3전선에 가담 하여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도쿄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8년 5월 고려 공산청년회 일본부 기 관지 편집 겸 출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5월 무산자사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또 『무산자』 를 발행하며 「정치적 시각에서 본 예술투쟁」, 「우리 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투쟁 해야 할 것인가」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재일본조선 노동총동맹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1930년 4월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 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1년 11월 동지사(同志社) 를 조직하였다. 이후 검거되어 한동안 옥살이 한 이 후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 조선협의회 위원장, 기관지 『우리동무』 편집장이 되었다. 일본 경찰에 검 거되어, 도쿄공소원(東京控訴院)에서 징역 2년을 선 고받고 1934년 4월 출옥하였다. 김두용은 1935년 5월 조선예술좌를 창립하 고 위 원장이 되었다. 『生きた新聞』, 『문학평론』 등에 다수 의 원고를 집필하였다. 1936년 2월경 조선신문사 편 집국원이 되었으며 7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9 년 1월 도쿄공소원에서 징역 1년 8월을 선고받았다.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의 방향 전환 김두용의 1920년대 활동에서 주목되는 활동은 문 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 가』에서 확인된다. 그는 이 문건에서 재일조선인 민 족운동의 방향을 정리했다. 당시 김두용은 이의석, 김호영 등과 1929년 9월부터 일본인 공산주의자와 의 긴밀한 협의 아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해체 운동을 주도했다. 김두용을 비롯해 이의석, 임철섭, 이선형 등의 재 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간부는 재일본조선노동총 동맹을 해체하여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이하 ‘전 협’)으로 합류하는 방침을 확립했다. 그리고 여기에 조선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도쿄(동경)학생예술좌’가 1935년 6월 4일 도쿄 쓰키 지(築地) 소극장에서 창단 첫 작품으로 유치진 작 ‘소’ 공연을 마친 뒤 출연 배우와 연출 스태프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아단문고 제공). 김두용(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