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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5년 2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날 선언서와 결의문 의 한국어본과 일본어본은 등사판으로 약 600장을 등사했고, 영어본은 타이프라이터로 찍었다. 선언서 의 등사는 훗날 남편이 되는 최원순(崔元淳) 등 광주 에서 온 유학생 10여 명과 밤낮으로 찍어냈다. 이날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 김마리아, 황신덕, 현덕 신 등을 포함한 27명이 체포되었다. 일본 외무성기 록 「조선인개황(朝鮮人槪況)」에 따르면 체포 당시 현 덕신 지사는 조선여자친목회 서기, 조선고학생동우 회 부장, 여자학흥회 부회장직 등 세 개의 직함을 가 지고 있을 정도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나온다. 현덕신 지사는 1922년 1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총독부의원과 동대문부인병원 등에서 진료 활 동을 하는 동시에 고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 가 입 및 ‘공창제 폐지와 사회결합’(1924.5.8) 이라는 주 제의 강연을 하는 등 적극적 여성운동을 병행 하였 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1924년 현덕신 은 조선기독교여자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국 내 여의사 4명 밖에 없던 시절, 밀려드는 환자를 돌 보는 일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여권신장과 문 맹퇴치 등에 대한 계몽 강연과 글쓰기도 게을리하 지 않았다. 또한 독립운동 단체를 이끄는 수장의 역 할까지, 현덕신 지사를 기다리는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갔다. 오죽하면 머리 빗을 1분 1초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단발머리를 감행했다는 이야기가 『별건 곤(別乾坤)』 제9호(1927.10.1)에 전할 정도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단발여보(斷髮女譜)’라는 제목 아래 “실질적으로 단발을 한 분은 동아일보 기자 최원순 씨의 부인으로 지금 동대문부인병원에 있는 매우 든 든한 일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광주 ‘현덕신병원’ 개원, 광주YWCA 회장 맡아 사회운동도 한편, 현덕신 지사는 1920년대 대표적인 여성독 립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의 창립 구성원으로 현덕신을 여자 의학생 ‘요주의(要注意) 인물(갑호)’로  지목하고 있는 일본 외무성의 보고서  「조선인개황」 (1920.6.30.) 의사면허를 따고 귀국하여 동대문부인병원에 근무하던(1923~26)  현덕신 지사(왼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