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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4년 9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아들의 순탄치 않은 삶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 았다. 아들 백범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 시정부 경무국장 직에 있을 때 고국에 있던 부인 최 준례 여사와 아들 인(仁)을 1920년 8월 상하이로 불 러들였다. 2년 뒤 어머니 곽낙원 지사도 상하이로 모 셔서 비록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백범 가족 은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시 간도 잠시일 뿐 나날이 임시정부 살림살이는 어려워 져만 갔다. 급기야 청사(廳舍) 집세가 밀리기 시작하 고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지 경이 되자 곽낙원 지사는 시장에 나가 버려지는 배추 시래기를 주워다가 반찬으로 쓸 정도로 최악의 시간 을 보내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며느리 최준례 여사가 차남 신(信)을 낳고는 산후조리 중에 숨을 거 두자 어린 두 손자를 떠안게 되는 운명에 처했다. 극빈의 임시정부 시절 아들 백범이 독립운동에 매 진할 수 있도록 곽낙원 지 사는 두 손자를 데리고 귀국 길에 오 른다. 귀국의 이유는 또 하나 있 었다. 어린 두 손자가 영양실조 로 죽게 될 지경인지라 구걸해 먹어도 고향이 낫다고 판단한 것 이다. 이는 당시 임시정부의 살 림살이가 얼마나 어려웠나를 고 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러나 귀국은 했지만 아들 백범 이 일제경찰에 감시를 받는 인물 이라 어머니 곽낙원 지사도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손자 들이 크자 곽낙원 지사는 백범이 있는 중국으로 가 기 위해 황해도 안악경찰서에 출국허가를 제출해보 았지만 경성(京城)의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이를 즉 시 저지시켜 중국으로 가는 길이 원천 봉쇄되고 말 았다. 그러나 포기할 곽 지사가 아니었다. 현명한 곽 지사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일제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둘째 손자의 병 치료를 위해 신천으로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집을 떠났다. 일제경찰은 살림살이를 그대로 놔두고 떠난 곽 지사가 설마 중국으로 가리 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곽 지사 의 위장전술이었던 것이다. 그때 큰 손자 김인은 평양숭실학교 3학년이었는 데,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손자 를 몸만 빠져나오게 하여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올랐 다. 이때 곽낙원 지사 나이 76살이고 큰 손자는 18 살, 작은 손자는 13살이었다. 이들의 중국 망명 코스 백범 가족사진(앞에 앉은 분이 곽낙원 지사)  곽낙원 지사의 며느리 최준례 여사의 무 덤에서 백범 가족(국사편찬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