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page

74 2024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7월의 독립운동가 라 조혼하여 슬 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경성의 학전문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가 담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청년외 교단’의 편집부 장으로 외교시 보 발행 및 전단 을 인쇄 · 배포하 는 일을 맡았다. 만세시위를 위해 작성된 「국치기념 경고문」 300매를 인쇄하여 배포 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제에 수배되면서 상하이로 망 명했다. 그는 이름을 ‘Yiking Li’라고 중국식으로 고친 후 상하이에서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1920년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탔다. 이의경은 마르세유에 서 안봉근과 안중근의 종부성사를 집전했던 빌렘 신 부의 도움을 받아 독일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로 간 후 다시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으로 가서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뷔르츠부 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 였고,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1928년에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뮌헨대학 재학 당시 이의경은 베를린대학의 이극 로·황우일 파리대학의 김법린 등과 함께 1927년 2 월 10일부터 14일까지 벨기에 브뤼셀의 에그몽 궁 (Palais d’Egmont)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결 의대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대회에 첫째, 시모노세키조약을 실행해 한국의 독립을 확 보할 것. 둘째, 한국 내 총독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셋째,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 을 제안했다. 이의경은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소책자의 초안을 작성하고, 완성된 결의문을 독일어, 불어, 영어로 번역하여 한국의 처 한 상황과 독립의 의지를 알렸다. 이들의 노력으로 2 월 14일에 발표된 대회의 최종 결의안에 한국대표단 의 결의문도 채택되어 포함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8년 졸업 후 이의경은 잡지투고, 기고 및 번역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때 집필한 『압록강은 흐른 다(Der Yalu fliesst)』는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역 작으로 1946년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독일 언론은 올해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훌륭한 책 으로 이미륵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의 작품은 독일 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였다. 한국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죽음」이란 책을 통해 잘 알려 진 독일의 저항단체 ‘백장미단’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은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 교수는 이미륵의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1943년 후버 브뤼셀 세계피압박민족대회 개최지 에그몽궁전(독립기념관 제공) 유덕고려학우회가 세계피압박민족 대회에 배포한 『한국문제』 소책자 (이의경 소장본, 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