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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4년 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월의 독립운동가 는 내용의 선언서를 2천만 동포에게 공포했다. 1919년 9월 상해(上海)임시정부, 노령(露領)임시 정부, 한성(漢城)임시정부 등을 통합한 ‘통합’대한민 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선출되 었다. 임시대통령에 오른 후 공채표를 발행하여 마련한 독립자금으로 구미위원부를 통한 외교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때 미국의 정부와 여론 주도층 및 미국 안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호 소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며 일제의 침략정책 을 규탄하는 선전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선출되기 전인 1919년 8월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이는 파리강화회의와 같은 국제회의와 미국정부를 상대로 외교선전활동을 담 당할 독립기관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활약한 김 규식(金奎植)이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승만은 당 연직 위원으로서 모든 사무를 총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미위원부는 기부·세납·차관 등의 방법을 통해 재미한인사회와 외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 받았다. 이를 위해 5종의 독립 공채표를 발매 했다. 또한 외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라는 친한단체를 미국 중· 동부와 서유럽에 설치하여 한국문제를 구미 각국에 알리고 한국을 지지하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 다. 『한국평론』과 『자유한국』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 동 서적과 팜프렛을 출판하여 한국독립을 강조하고 일제침략을 규탄했다. 그러면서 헐버트(Homer B. Hulbert) 등 친한파 인사들을 연계하여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강연과 연설 활동을 벌였고, 미국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로비활 동을 추진하여 한국독립문제를 상정하고 토의하게 했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미국 워싱 턴에서 열린 워싱턴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서 한국대표단 단장 으로서 외교독립활동을 벌였다. 이때 임시정부와 국 내외 각종 단체 및 뉴욕 유학생단체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대표단에게 발언권을 주거나 본회의에서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채택해줄 것을 군축회의에 강 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미·영·프·일 등 군축회의를 주도한 열강들은 한국대표단의 요구를 거부했다. 임시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추진한 워싱턴군축회 의에서의 한국독립 문제 상정이 무산되자 임시대통 령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에 따라 신규식(申 圭植) 내각이 붕괴하고 임시정부 내 기호파(畿湖派) 의원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이어 1923년 1월부 터 6월까지 임시정부 개혁을 둘러싸고 개조와 창조 문제가 논의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임 시정부의 개조나 창조를 반대하고 현상유지를 내세 우며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1925 년 3월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되었다. 미국 하와이 망명 및 국제외교활동 1924년 11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한인대 표회를 개최했다. 회의 목적은 1921년 7월 임시정 부를 옹호하고 교포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한 대한인동지회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동지회 총재로 선출되었고, 『태평양잡지』를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