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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3년 11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같은 해 11월 무렵 귀국, 370원을 모금했다. 이를 박 정식 편에 송금하여 상해로 보내는 등 군자금 모집 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내 요주의 인물로 일 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장두철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에 있을 때도 1921년 도 쿄 우에노공원에서 동지 이덕요, 이낙도, 이의향 등 과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 혀 가혹한 고문 끝에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직후에도 고수선은 독립운동에 관여하다 잡 혀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이 불구가 되는 고통을 겪었다. 생전에 고수선 지사는 손가락 사이에 연필 을 끼워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 고 한다. 이후 고지사는 1924년 4월, 경성의학전문 학교에 편입한 뒤 1926년 3월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땄다. 19 26년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 1927년 1 월 경 개 벽 사 신입회원에 가 입했다. 그해 2 월 제주도 조천 여자청년회 제 2회 정기총회에 서 임시 의장으 로서 회의를 주 재하였다. 한편 고수선 지사는 1927년 경성의전 출신인 김태민 선생과 결혼해 조천에서 장 춘의원을 개업한 이래 인술을 펼치면서 독립운동에 도 적극 관여했다. 1928년 1월 제주청년연합회 주최 로 재만동포옹호동맹발기회가 개최되자 선전부원으 로 활동했으며, 그해 5월에 열린 제주여자청년회 총 회에서 사회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관북 일대의 수재민을 위해 구제금을 기부하는 등 지역사회를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해방 후 교육 · 사회운동 전개, 어린이 · 여성 · 노인 등 약자 위해 헌신 그러나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 기간 중반, 충남 강경으로 잠시 생활 터전을 옮겼다. 1951년 6·25한 국 전쟁 중에 다시 제주로 돌아와 의사생활을 접고 재건운동, 여성운동, 사회복지활동 등을 적극 펼쳤 다. 이 무렵 전쟁고아들을 거두고 문맹퇴치를 위한 고수선 지사에게 청소년들은 모두 자신의 아들딸이었다.